살아버리는 힘. 살아벌이는 짓.
나는 도망치지 않는다.
이 문장은 다짐도, 각오도 아니다.
이 문장은 내가 어디에 서 있는가를 설명하는 문장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 문장은 나를 가장 쉽게 속일 수 있는 문장이기도 하다.
“나는 도망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도망치지 않는 사람이라는 이미지 뒤에 숨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문장은 나를 보호하기 위한 문장이 아니라
나를 숨지 못하게 만드는 문장이어야만 한다.
나는 도망치지 않는다는 말을 두려움이 없다는 뜻으로 오해해왔다.
하지만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없다.
두려움은 언제나 먼저 온다. 그건 인간 조건이다.
도망치지 않는다는 것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는게 아니라,
그 두려움이 포기라는 결론까지
나를 끌고 가지 못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두려움은 감정이다.
포기는 판단이다.
감정은 생겨날 수 있지만,
판단은 넘겨줄 수도 있고, 지켜낼 수도 있다.
즉,
나는 두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끝까지 인정한 상태에서
그 두려움이
‘이쯤에서 그만두자’는 말로 나를 대신 말하게 두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늘 이 질문부터 하기로 한다.
나는 이 선택의 결과를 감당할 수 있는가?
성공할 수 있는가를 묻지 않는다.
실패해도
나를 버리지 않을 수 있는가를 묻는다.
두려움이 나를 흔들 수는 있어도,
포기라는 이름으로 내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하지는 않는다.
이 질문 앞에서는
낙관도, 각오도, 긍정도 소용이 없다.
여기서 필요한 건 용기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정확한 평가다.
그리고 나는 답했다.
된다.
하지만 이 “된다”라는 말은
나를 안심시키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오히려 나를 몰아붙이는 말이다.
왜냐하면
“된다”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변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환경 탓도, 조건 탓도, 타이밍 탓도 이제는 설 자리가 없다.
이 말은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된다”는 말은
“된다”는 말은
미래를 위로 삼는 말이 아니라,
현재의 나를 변명 없이 신뢰하겠다는 퇴로 없는 결단이다.
행위가 발생한 뒤에만 드러나는 원리를 보았다.
인식이 바뀌어서 행동하는 경우보다
행동했기 때문에 인식이 바뀌었다.
행위는 되돌릴 수 없고,
인식은 그 행위를 감당하기 위해 재구성된다.
그래서 많은 깨달음은
생각 끝에서 오지 않고
이미 저질러진 선택 뒤에서 따라온다.
이때 인식은 변명하지 않는다.
이미 이렇게 살고 있으니,
이 삶을 내 것으로 이해해야겠다.
그래서 나는 기다리지 않는다.
완벽히 준비될 때까지,
조건이 갖춰질 때까지,
확신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기다림이
신중함이 아니라
도망을 합리화하는 가장 지적인 방식일 수 있다는 걸
이미 여러 번 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안다.
되기 전에 해야만 비로소 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일들은
조건이 아니라 행위에 의해서만 열린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선택했다.
그리고
나는 나약함이 강함이라고 말하지 않겠다.
단어로 보면 나약함과 강함은 분명히 반대편에 있다.
하지만 나는 안다.
직면되지 않은 강함은 허상이고,
직면된 나약함만이
강함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을.
나약함을 숨긴다고 해서
사람이 커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드러냄이 성장인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드러냄의 여부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거짓말하고 있는가다.
고백은 선택일수 있으나
자기 인식은 회피할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분명한 기준이 있다.
진짜 직면은
절대 삶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
말이 달라지고,
반응이 달라지고,
머무는 자리가 달라진다.
그래서 나는 도망치지 않는다.
우주가 도망치지 않듯이.
우주는 모든 결과를 통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결과도 배제하지 않는다.
붕괴조차 다음 질서의 조건으로 통과시킨다.
“나는 우주다”라는 말은
내가 위대하다는 선언이 아니다.
이 말은
내 삶의 사건들을
예외 처리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나는 생성하고,
확장하고,
무너지고,
다시 정렬한다.
그 과정에서 빠져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도망치지 않는다.
이미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할 수 있다는 건
모든 걸 이긴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결과가 오더라도
그 자리에서 나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문장을 쓰는 지금도
나는 이 말을 나에게서 숨기지 않는다.
이 말이 나를 구원하는 순간이 아니라,
나를 계속 시험하는 문장으로
남아 있도록.
설명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그냥 간다.
* 니체. 인간적인너무나인간적인2. 책세상. 우리의 습관적이고 부정확한 관찰은 한 무더기의 현상들을 하나로 보고 그것을 사실이라고 이름 붙인다. 그리고 이 사실과 다른 사실 사이에 빈 공간이 있다는 생각을 덧붙여 각 사실들을 분리시킨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의 모든 행동과 인식은 사실들과 빈 사이 공간의 연속이 아니라 부단한 흐름이다.
더 이상 나 자신에게 거짓말하지 않기 위해
책을 읽고 삶을 살아내며 정신의 기준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자녀는 말이 아니라 제가 살아내는 방식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 손에 건네줄 책이 세상에 나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