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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람 May 21. 2024

지구방위대를 탈출하는 법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일 때

어릴 때 게임 메이플스토리를 한 적이 있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였는데, 하루에 적어도 2시간씩은 꼭 했던 것 같다. 밥 먹고 게임만 하는 친구들에 비해선 꽤 적은 양이지만, 그래도 매일 매일 2시간씩이면 적은 시간은 아니다. 부모님의 걱정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다행히 중학생이 되기 전, 함께 게임을 하곤 하던 친구와 크게 싸우고 나서 메이플스토리를 지웠다. 계속 몬스터를 죽이는 노가다가 몹시 지겹기도 했다. 내가 듣자하니, 지금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의 진짜 돈으로 메이플스토리 아이템을 산다고 한다. 그걸 사용하면 레벨이 낮아도 공격력이 높아져서 금방금방 레벨업을 할 수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그런 개념이 없었다. 레벨이 높아질수록, 요구되는 경험치가 높아져서 다음 레벨업이 너무나 힘이 들었다. 레벨이 60 가까이 되었을 무렵, 나는 드디어 메이플스토리를 접었다.     


레벨이 60 비스무리하게 될 때까지 게임에서 온갖 일을 겪었지만, 이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막 새로운 대륙이 출시되었을 때였다. 루디브리엄이라고, 장난감 몬스터가 나오는 대륙이었다. 그때 나의 레벨은 23 정도였다. 신대륙은 본디 레벨이 높은 사람들을 위한 몬스터가 많이 나오기 마련이다. 레벨이 높아 구대륙에서의 몬스터에 만족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레벨은 말했듯이 23이었다. 구대륙에서도 낮은 편에 속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루디브리엄에 가면 안되는 거였다. 그러나 모험심이 충만했던 나는 루디브리엄행 배에 타고 말았다.     


와아! 가보니 갖가지 새로운 몬스터들이 많았다. 실제 여행을 많이 다니지 못했던 나는 게임속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이 다 신기했다. 신기한 세상을 여행하는 기분이랄까. 나는 당시 호기심과 모험심이 충만한 초등학생이었고, ‘루디브리엄 탑’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당장에 달려갔다. 그리고 100개의 층이 있는 그 탑을 하나하나 계속 내려가기 시작했다. 장장 두 달간의 슬픔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당연히 그때는 그걸 몰랐다.     

 

나는 100층을 내려가며 온갖 몬스터들을 구경했다. 그 중 최강, 최악의 몬스터는 탑의 하층 부분에 출몰하는, 레고블록으로 만든 듯한 거대한 블록골렘이었다. 부딪히기만 해도 엄청난 데미지를 입었다. 어찌어찌해서 1층 맨 아래로 내려왔다. 그러자 새로운 맵이 나왔다. 이름은 지구방위대. 그 맵에는 경찰차 사이렌처럼 긴장감을 주는 이상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이 맵은 온갖 외계인들이 나오는 신기한 맵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륙의 지하에 외계인으로부터의 침입을 막는 ‘지구방위대’가 있다는 상상력이 놀랍다. 게임 만드시는 분들의 창의력은 정말 놀랍다고 생각한다. 어찌 됐든 나는 신나게 방방 뛰며 외계인을 만나러 갔다.      


그런데 외계인들이 다 레벨이 엄청나게 높은 거였다! 정말 식겁했다. 다 크기는 그렇게 크지 않은데, 공격을 받으면 엄청나게 내 체력이 닳았다. 거의 레고골렘 수준이었다. 나는 외계인 몬스터를 피해 조금 쉬다가, 루디브리엄 탑을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도저히 아래층은 사람 살 곳이 아니었다. 시끄러운 노래도 왠지 기분 나쁘고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맵을 내려가는 건 쉬웠다. 그냥 텅 빈 곳을 따라 떨어지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그런데 올라가는 건, 쉽지 않았다. 계속해서 블록골렘에게 죽기 시작했다. 아무리 준비를 해가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총 100층의 탑이라고 내가 말씀드렸다. 100~51층, 탑의 윗부분에서 죽으면 루디브리엄으로 가지만, 50~1층에서 죽으면 지구방위대로 가게 된다. 검색을 해보니 그러했다. 나는 주로 20층 정도에서 죽었으니, 죽으면 그대로 지구방위대, 0층으로 오게 되었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40층 가량에서 아깝게 죽은 적도 있었다.  

    

나는 결국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나의 같은 반 친구 K는 당장에 달려와 주었다. K의 캐릭터는 마법사 캐릭터로, 레벨은 나보다 훨씬 높았다. K는 나를 데리고 탑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블록골렘을 스스로 처치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내가 새로 나타난 블록골렘에게 자꾸 죽었다. 그런 일이 10번 정도 반복되자, 친구도 이젠 완전히 지쳐 버렸다. 나의 원성에도 불구하고 K는 홀로 탑을 올라가 버렸다. 그리고 루디브리엄에서 혼자 장난감을 사냥하며 잘 놀았다. K는 레벨이 높으니까 말이다. 그때 나는 굉장히 서운하고 속상해서 눈물까지 나왔다. 그런데 사실 내가 어려서 뭘 몰라서 그랬던 거고, 맵 최하층까지 당장에 달려와 준 K는 정말 착한 애였다.     

 

어쨌든 이거 큰일이었다. 게임만 틀면 딴딴따다~ 하는 사이렌 소리 같은 위협적인 소리가 나왔다. 몬스터는 너무 강력해서 한 마리 죽이기도 힘들었다. 점점 더 이 맵에 정이 뚝 떨어졌다. 거지 같은 지구방위대! 나는 분통을 터뜨렸고 게임을 하기 싫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어쩔 수 없이 컴퓨터를 멀리했다. 부모님은 드디어 애가 철이 들었다고 생각하셨다. 나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  

    

하지만 게임이 너무나도 하고 싶었던 나는 한 달 뒤 결국 인터넷에 조사를 시작했다. 목마른 자가 우물 판다는 말은 정말이다. 학교 공부에서도 배울 수 없었던 ‘자율성’을 배우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나는 네이버에 검색했다. 루디브리엄 탑 어떻게 올라가나요? 그러자 나오는 정보들이 있었다. 그 정보에 의하면, 지구방위대에서 파는 아이템이 있었다. 한 장을 사용하면 25층까지 한 번에 올라간다. 하나를 더 사용하면 50층까지 올라간다. 하나를 더 사용하면 75층, 하나를 더 사용하면 100층에 이른다는 거였다. 나는 계획을 세웠다. 두 장만 있으면 돼. 그리고 한 층 더 올라가 51층까지 올라가서 거기서 죽으면 되지. 51층부터 100층 사이에서 죽으면 루디브리엄으로 올라가니까. 나름 합리적이고 정확한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템을 사기에는 너무나 큰 돈이 들어갔다. 정확히는 레벨 23의 나에겐 너무나 큰 돈이었다. 그런데 친구가 내려왔을 때, 내게 건네준 아이템 하나가 있었다. 나는 그게 뭔지 몰랐지만 일단 받고 봤다. 그런데 그 아이템이 뭔지 확인하니, 탑을 올라가게 해주는 그 문서가 맞았다. 일단 25층까지는 확보한 거였다. 그리고 한 장이 더 필요한데 돈이 없었다. 나는 할 수 없이, 저 끔찍한 외계인들을 상대해야 했다. 몬스터를 죽여야 돈이 나오기 때문이다. 싼 물약을 엄청나게 많이 샀다. 그리고 계속 먹어가면서 한 마리를 겨우 죽였다. 그러자 몬스터가 죽으면서 나온 돈이 장난이 아니었다! 와우! 몬스터 레벨이 높은 만큼 보상을 많이 주는 것이다. 가능성이 보였다.      


그렇게 몬스터를 잡기 시작했다. 한 마리 잡는데 굉장히 오래 걸렸다. 공격력이 낮으니까 말이다. 중간에 한번 죽기도 하고 레벨업도 한번 했다. 그렇게 한 20마리 정도 잡으니까 돈이 다 모였다. 그래서 나는 결국 한 장의 탑 문서를 더 샀고, 50층까지 한 번에 올라갔다. 1층 더 올라가는 건 일도 아니었다. 탑의 윗부분이라 블록골렘도 나오지 않았다. 탑을 더 올라가기가 너무너무 질렸던 나는 51층에서 고의적으로 죽었고, 마침내 꿈에 그리던 루디브리엄으로 돌아왔다. 내 인생에서 그때만큼 행복했던 때는 잘 없었다. 방방 뛰며 당장 구대륙으로 돌아왔던 기억이다.      


지구방위대에 약 두 달간 갇혔던 때의 막막함을 아직도 기억한다. 친구는 나를 버렸고, 레벨이 낮은 나로선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상황은 너무나 불행했고 희망이 없어 보였다. 내 잘못이니 탓할 상대도 없었다. 그런데 내 힘으로 루디브리엄으로 올라왔을 때,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내 힘으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꼈다. 이게 게임의 순기능이라고 생각한다. 자신감을 갖게 만드는 것 말이다. 항상 이길 순 없더라도, 게임 속에서 여러 가지 상황을 스스로 헤쳐나가면서 얻는 만족감은 분명 있다. 그렇다고 게임을 많이 하라고 권유하는 것은 아니다. 오해 마시기를.   

   

사실 나는 요즘 조금 막막하다. 내 힘으로 현실의 벽을 넘어설 수 있을까,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같은 갖가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나의 현재 상황도, 어찌보면 옛날에 지구방위대에 갇혔던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중요한 건 어떤 상황에서든 “내가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날 구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굳세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안 좋은 상황에서 빠져나갈 정보를 차근차근 모으다 보면,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한다는 전략이 세워질 것이다. 어린 시절의 내가 탑의 51층까지만 가면 된다는 결론을 내렸듯이 말이다. 가장 효율적인 전략이 세워지면, 그 전략에 따르기 위해 해야 하는 모든 합법적인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조금 힘들더라도 개의치 말아야 한다. 인생은 옛날의 메이플스토리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노가다니까, 말이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 그 상황에서 거짓말처럼 빠져나온 나를 보게 되지 않을까. 모든 분들이 자신만의 루디브리엄에 도착하시기를 바란다. 나는 그날의 내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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