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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람 May 17. 2024

질투와 사랑의 상관관계

나한테는 왜 고백을 안하냐고!

질투의 감정은 아릿하다. 내가 기억하는 한 최초로 누군가에게 질투를 느껴본 것은 초등학교 때였다. 그때 나는 썸을 타는(?) 한 남자아이가 있었다. 아직 어렸지만 어린 아기도 멋진 사람을 보면 방긋 웃지 않는가. 이성적 호감은 나이를 떠나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이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나는 그 아이를 좋아했다. 첫사랑이라고나 할까. 그 애가 어떤 애였는지 이젠 별로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 그 애가 내 그네를 오랫동안 밀어준 적이 있었는데, 이제야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정말 고맙다. 여하튼.      


그 애도 아마 나를 좋아한 것 같다. 내 생각엔 둘 다 몇 년간 쭉 그랬었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이엔 어떠한 기류 같은 것이 흘렀고, 다른 애들도 우리를 종종 놀리곤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점점 멀어졌다. 아마도 서로 다른 반이 되어서 그럴 것이다. 초등학생 때는 어떤 친구와 같은 반인 게 굉장히 중요하지 않은가. 중학생만 되어도 상황이 좀 다르지만 말이다. 그렇게 서로 다른 반이 되어, 만날 일이 적었던 때였다. 어느 날 그 애가 다른 애와 사귄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때만큼은 기억이 아주 생생하다.      


충격이었다. 내 얼굴에 아마 큼지막하게 ‘충-격’이라고 쓰여 있었나 보다. 주위 애들이 엄청나게 재미있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기 때문이다(아시다시피 아이들은 종종 잔인할 때가 있다). 이미 그 애와 내가 미묘한 기류를 타고 있었던 것을 그 자리에 있는 거의 모든 애들이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때 다른 아이들의 반응을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그 애가 다른 애와 사귄다는 새로운 정보를 처리하기에도 머리가 부족했다. 몇 초간 입을 벌리고 아무 말도 못했던 것 같다. 다른 애랑 사귄다고? 왜? 나한테는 왜 여태 고백을 안 했지? 왜???     


그날 돌아오는 길에 보았던 오후 4시의 태양은 황금빛이었다. 다들 아시겠지만, 그 당시 보편적이었던 복도형 아파트의 복도에는 난간이 있다. 내가 집으로 들어가기 전 보았던, 하얀 복도 난간의 윗부분에, 오후의 황금빛 태양이 부딪혀 한없이 반짝반짝 빛나던 것이 기억이 난다. 너무 아름다운데, 너무 슬펐다. 울지는 않았지만, 굉장히 착잡했다. 내가 뭘 잘못했나? 내가 싫어졌나? 아니 왜 나한테는 고백을 안하냐고!!!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굉장히 웃픈 기억이다. 어린애들이 뭘 안다고. 하지만 사랑의 감정은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것이기에, 내가 그 당시에 정말 그 애를 좋아했구나, 싶다. 당연하지만 지금은 그 애에 대한 감정이 전혀 없다. 얼굴도 기억 안 나니까 말이다. 게다가 기억 속의 얼굴 없는 그 애는 아직도 초등학생이니 감정이 남아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날 아파트 복도를 걸으면서 느꼈던, 뱃속이 뒤틀리는 듯한 질투의 감정만큼은 기억이 난다. 내가 좋아하던 남자애와 사귀고 있는 바로 그 여자애를 향한 질투였다.     


그로부터 무려 2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는 그때보다 현실적인 것으로 질투를 더 많이 느낀다. 성공해서 부와 명예를 소유한 사람들이나,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나보다 더 잘 해내는 사람들을 향한 질투다. 그러나 누군가를 질투하게 되면, 저절로 내 마음이 너무 버거워진다. 그래서 그냥 부러워하는 편을 선택하는 것 같다. 그 사람이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누군가에 대한 질투로 인해 그 사람이 싫어지려고 하면, 나는 의도적으로 말한다. “진짜 부럽다. 이건 내가 부러워서 이러는 거야.”      


그러면 질투를 꼭 질투로 남겨 둬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내 생각에 질투는 부러움으로 변화할 때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있다. 부러움을 느끼는 상태가 되면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게 아니라 선망하게 되고, 그 사람의 좋은 점을 좀 더 닮을 마음이 나기 때문이다. 반면에 질투를 하게 되면 그 사람과 나 사이에 심리적인 분리가 일어난다. 그 사람의 좋은 점을 닮고 싶어지지 않는다. 대신 그 사람의 좋은 점을 외면하고 어떻게든 추락시키고자 노력하게 된다. 그것도 어찌 보면 노력이니 스스로 힘이 나는 방법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감정을 지속할수록 그 사이에 마음이 너무 힘들 것이다.     


질투의 근본 원인은 희소자원에 대한 갈망이다. 예를 들어 진정한 사랑은 희소하다. 돈, 명예, 권력 등도 마찬가지다. 가진 사람이 가지지 못한 사람보다 수가 적은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우린 매순간 우리의 질투를 유발하는 사람과 마주칠 수밖에 없다. 정 힘들면 아예 안 보는 것도 답이다. 그냥 얼굴 보는 것만으로도 미칠 듯이 부러운 친구나, SNS상의 부유하고 재능 있고 아름다운 사람들을 아예 안 보는 것이 나을 때도 있다. 도저히 질투를 감당할 수 없다면 말이다. 그거 아는가? 나는 그 여자애, 나에게서 첫사랑을 앗아간 그 여자아이를 결코 보지 않았다. 그 애가 같은 학교에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다른 반이라 얼굴을 볼 기회가 원래 적기는 했지만 만약 기회가 있었다 하더라도 나는 외면했을 것이다. 외면하는 것도 그리 성숙한 방법은 아니지만, 머리끄덩이 잡고 싸우거나 뒤에서 안 좋은 소리를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돌이켜 보니, 내가 앞에서 지금은 보다 현실적인 일들로 남들을 부러워한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아직도 진정한 사랑을 얻은 사람들이 제일 부러운 듯하다. 나는 사랑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로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순간의 열정이 아니라, 서로 이끌리면서도 굉장히 친밀하고, 상대에게 헌신할 수도 있는, 꽉 찬 삼각형의 사랑 말이다(진정한 사랑의 세 가지 요소가 열정-친밀감-헌신이라는 정의는 에리히 프롬의 명저 <사랑의 기술>을 참고했다). 누군가가 나를 진심으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은 참 귀하면서도 드물다. 이러한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가치이지만, 천금보다도 귀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글을 쓰면서 오랜만에 첫사랑을 떠올려 보았다. 그때처럼 내가 또다시 사랑을 이유로 누군가를 질투하게 될지, 내 마지막 사랑은 과연 누가 될지, 나는 요새 그런 것들이 자꾸 궁금하다. 그러면서 괜히 싱숭생숭하다. 아아, 봄인가 보다.      


2024.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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