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영화 <파묘> 등을 통해서 사람들이 무속에 대해 많이들 궁금해하시는 것 같다. 최근 나온 여러 가지 무속과 점술에 관한 영화들로 인해, 본래 그런 것들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까지도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것들’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무당이라는 대리인을 통해 신과 교류한다는 무속신앙과, 그 사람이 태어난 날과 시를 통해 사람의 운명을 예측한다는 사주, 얼굴을 통해 미래를 본다는 관상, 땅에 관해서 연구해 사람의 길흉화복을 알 수 있다는 풍수지리, 결혼하기 전 으레 보게 되는 궁합, 그리고 요즘 급속도로 인기를 얻고 있는 타로카드까지, 참 다양하다. 하지만 오늘은 사주에 대해서만 이야기해볼까 한다.
사주는 일단 참 흥미롭고 재미있다. 나의 성격부터 시작해서 나의 과거, 현재, 미래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여주니 말이다. 심지어 내게 적합한 직업이 무엇인지, 내가 만날 배우자가 어떤 사람인지까지도 보여준다. 미래에 직업적으로 성공할 시기는 언제쯤인지, 배우자를 만날 시기가 언제쯤 인지도 보여준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우리에게, 미래가 예측 가능하다는 생각은 무척이나 흥미롭다. 누구나 당연히 자신의 미래를 알길 바란다. 더 잘 준비할 수 있도록 말이다. 예를 들면 언제쯤 배우자를 만날 거라는 말을 들으면, 몹시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을 놓치지 말고 꽉 붙잡아야지, 하는 사람이 있다. 그게 나였다.
사실 나는 올해 초에 사주를 봤는데, 올해 운명의 사람을 만난다고 했다. ‘올해 운명의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사주를 잘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꽤 들뜰만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사주 보는 것을 좋아하고 종종 맹신하기까지 했던 나란 사람은 어떠했겠는가. 올해 초에 나는 매우 기분이 좋았고 올해 만날 그 사람에 대해 많은 기대를 했었다. 또 이런 일도 있다. 나는 20대 때 너무나 힘든 일이 많아서, 사주에서 40대가 내 ‘전성기’라고 하는 말을 매우 강하게 믿었다. “지금은 힘든 일이 많지만, 40대에는 분명 좋은 일이 있을 거야.” 그땐 그것이 내 유일한 희망이었다. 뭐, 그게 그다지 나쁜 일이라곤 생각지 않는다. 내가 무너지지 않을 희망의 보루가 되어주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은 분명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사주를 믿기 시작하니 나 자신에게 변화가 전혀 없었다. 이전에 나는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전심전력으로 노력하던 기간이 있었다. 그때는 힘들어도 꾹 참고 계속 상황을 어떻게든 바꿔보기 위해 노력했었다. 그런데 ‘전성기’가 40대에 온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느긋해졌다. 일이 풀리면 좋고, 안 풀리면, 말고. 어차피 40대가 되면 거짓말같이 일이 잘 풀릴 거야. '이러면 안 되지'라고 생각하고 노력하려고 하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그래도 40대가 되면 잘될 거야’라는 생각이 들어 안이해졌다. ‘운명의 사람’ 문제도 그렇다. 나는 사실 원래 부담을 몹시 잘 받는 성격이다. 본의 아니게 철벽을 치는 성격이기도 했다. 올해 운명의 사람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설마 그러겠어’라고 생각하면서도 몹시 심적으로 부담이 되었다. 그래서 내게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이전보다 더 철벽을 치게 되었다. 물론 무의식적이었다. 나중에야 내가 철벽을 몹시 강하게 둘렀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그러다 문득 정신이 들었다. 나는 40대에 잘된다고 지금 철석같이 믿고 있는데, 만약 그때가 되었어도 지금까지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그건 정말 큰일 아닌가! 그때가 되면 다시 일어서기가 더 힘들 텐데 말이다. ‘운명의 사람’도 어쩌면 올해에 안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주만 믿고, 사람들을 철벽 치다간 좋은 사람이 이전보다 훨씬 더 생기지 않을 것이다. 나는 뭔가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다른 것이 아니라, 내 사고방식 면에 있어서의 변화 말이다. 사주를 맹신하던 과거의 나에서, 자기 자신과 하나님을 믿으며 굳세게 나아가는 나로 변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아무 결과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 일도 안 할 테니 말이다.
올해 초까지의 이야기다. 드디어 나는 더 이상 사주를 믿지 않는다. 정해진 운명 따위는 없다고 생각한다. 한번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자 사실 사주라는 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깨닫기 시작했다. 사실 사람의 인생이 어떻게 그까짓 몇 줄로 요약이 가능하겠는가. 우리에게는 매 순간 고난이 닥치고, 그걸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서 더 좋은 방향으로 갈 수도 있고 더 나쁜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 그게 축적되어 나 자신의 삶의 모양새가 된다. 그 모든 과정들을, 그 모든 순간에 깃들어 있는 나의 ‘삶’을, 단 몇 줄로 깔끔히 정리해 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나의 수많은 고민들, 그리고 결단, 실행과 노력을 어떻게 역술가가 감히 재단할 수 있겠는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인생은 오롯이 자신에게 달렸다고 생각한다. 나의 마음 자세, 나의 태도, 나의 말과 행동처럼 내가 제어할 수 있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오직 신께 맡길 뿐이다. 나는 이제 미래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사실, 우리는 미래를 ‘전혀’ 알 수 없다. 그야말로 딱 한 치 앞도 못 본다. 지금 이 순간 이후의 1초도 우리에겐 완전한 미지의 세계다. 그건 나 자신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이나 역술가에게도 마찬가지다. 요즘 히어로물이나 선협물이나, 시간여행에 관한 내용이나 인생을 다시 사는 판타지적 이야기들이 범람하고 있다. 물론 정말 재밌다. 나도 잘 본다. 보통의 이야기들보다 훨씬 흥미로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신이 아니고, 초능력자도 아니고, 한번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도 없으며, 과거로 돌아가거나 미래로 먼저 가볼 수도 없다. 우린 그냥 일상을 사는 보통 사람이다. 우리는 그저 우리에게 주어진 만큼의 힘만 가지고 있다. 지력, 체력, 의지력, 그런 것들 말이다. 우리에게 초능력은, 슬프지만, 단 한 줌도 없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러하다.
역술가들도 사람이다. 그들도 미래를 전혀 모른다는 것을, 결코 한 치 앞도 모른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게 어떨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에겐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고, 우리를 도와주거나 아니면 도와주지 않는 초자연적인 힘이 분명 존재한다고 말이다.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 힘을 엿보는 것은 우리의 임무가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엿볼 수도 없다. 괜히 ‘초’ 자연적인 힘이겠는가. 애초에 우리를 넘어서는 힘이다. 뭐 어찌어찌해서 미래를 엿본다 하더라도, 그걸 엿보는 게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고 어떻게 장담하는가? 사주를 보는 게 오히려 역효과가 났던 나처럼 말이다.
올해에 운명의 사람이 오거나, 직업적으로 성공할 기회가 온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나 그 사람과 인연을 맺거나 성공할 기회를 붙잡는 사람은 그걸 미리 엿본 사람이 결코 아니다. 미래를 보진 못하지만, 자신이 처한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뿐이다. 미래를 흘깃흘깃 보며 한눈을 파는 사람은, 다가오는 현재의 소중함도 잘 모르고, 현재의 기회를 잘 잡아내지 못한다. 그러니 우리 모두 미래를 예측하기를 그만두었으면 좋겠다. 다만 현재를 진심으로 사랑하자. 우리가 나비처럼 날아오르느냐, 애벌레가 되어 머무르느냐는 오직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