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다
나는 학창 시절 내내 모범생이었다. 부모님과 선생님 말씀을 잘 듣고, 어길 생각조차 하지 않는 학생이었다. 부모님은 나를 과잉보호하셨지만 약간의 방임주의 기질도 있으셔서, 내가 집안에서 얌전히 놀고만 있으면 뭘 하든 신경 쓰지 않으셨다. 나는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주로 혼자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었다. 조금 외롭기도 했지만 즐거웠다. 당시 우리 집엔 책이 3000권 정도 있었는데, 매일 책을 한 권 한 권 뒤적이며 읽다가 잠들었다.
그러다 중학생이 되어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당시 경쟁심이 아주 많고 오기가 강한 아이였다. 중학교 1학년 때 엎치락뒤치락 헤매다가, 중학교 2학년이 되자 꾸준히 90점대 초반의 점수가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더 성적이 올라가질 않았다. 전교 등수는 약 50등 안팎이었다.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다 중학교 3학년 때 당시 전교 1등이었던 친구 E를 만나게 되었다.
E는 매우 상냥한 여학생이었다. 매우 수다쟁이이기도 했다. 내가 공부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이것저것 물어보면 하나하나 설명해 주곤 했다. 나는 존경할 점이 많은 E와 친해지면서 공부에 대한 태도를 많이 배워나갔다. 또 시험 기간에 어떻게 내신을 준비해야 하는지 등 공부에 대한 실질적인 팁들도 많이 배웠다. 성적은 수직상승했다. 평균이 95까지 올랐고 등수도 전교 20등 안에 들기 시작했다. 나는 기쁘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기뻤다.
중학교 3학년 때는 내신뿐만 아니라 연합고사도 준비해야 했다. 연합고사는 일종의 고등학교 입학시험이었다. 2학기가 되자 우리는 중학교 전 과정을 시험 보게 되어있는 연합고사를 준비하기 위해 학교에 자주 남았다. 서로 경쟁하면서, 하지만 도와주면서 참 많은 것을 배웠던 즐거운 시간이었다. 친절하고 상냥한 전교 1등이 있는 우리 반은 분위기가 참 좋았고, 공부에 대한 의지로 똘똘 뭉친 하나의 공동체였다.
그러다 드디어 연합고사가 끝났다. 대충 계산해 보니 전교에서 7등의 성적으로 연합고사를 보았다. 기분이 무척 좋았던 나는 아직 남은 2학기 기말고사를 대충 치겠다고 결심했다. 그건 애들 사이에서 돌고 있던 일종의 유행(?)이었다. 연합고사를 통해 갈 수 있는 고등학교가 정해진 시점에, 2학기 기말고사는 그리 중요하지 않으니 대충 보려는 애들이 참 많았다. 그런데 가족과 함께 어딘가 다녀오면서 부모님께 그런 결심을 말씀드렸더니, 부모님의 얼굴이 어두워지셨다. 내가 그 이유를 여쭤보니,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쓸데없는 시험이라도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다”라고. 나는 약간 반항을 했다. 다들 대충 보기로 했다고. 나만 또 힘들게 공부하기는 억울(?)하다고. 그렇지만 부모님께서는 완강하셨다. 나는 부모님 말씀을 어기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있던 시기였기에 할 수 없이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리고 잘 봤다. 난 기분이 좋았지만, 다 같이 공부를 안 했는데 나만 공부를 해서 좋은 성적이 나온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중학교 3학년 전체 성적을 합쳐서 졸업할 때 표창장을 준다는 거였다. 당연히 2학기 기말고사도 포함이었다. 나보다 더 잘했던 친구들은 2학기 기말고사를 대충 봤기 때문에 나보다 아래 성적으로 졸업하게 되었다. 나는 전교 3등의 성적으로 중학교를 졸업했다. 졸업식 때 단상에 올라가서 상도 탔다. 정말 세상에 태어나서 그보다 기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우리 반 전교 1등이었던 E는 언제나 그렇듯이 최선을 다해 공부해서 전교 1등으로 졸업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E와 나는 헤어졌다. 나는 E가 들어가는 고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그보다 아래 고등학교를 선택했다. E와 나는 서로 아쉬워했다. 우리는 선의의 경쟁상대이자 도움을 주고받는 친구였으니까 말이다. 나는 멀리 있지만 E를 경쟁상대로 삼고, 3년 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E를 마침내 이기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나는 중학교 겨울방학 때 정석을 미리 풀겠다고 결심을 했다. 전교 3등으로 졸업한 흐름을 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감이 충만했다. 수학의 정석 고1편은 상, 하 두 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 기억으론 모든 챕터를 합쳐서 40강으로 이뤄져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 40강을 홀로 풀어보기로 했다. 마침 고등학교 입학까지 45일 정도가 남아있었다. 하루에 한 강씩 풀면 되겠지. 나는 가볍게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했던 일 중에 가장 잘한 일이기도, 했다. 난 당시 널려있던 인강도 볼 생각도 안 했다. 그러려면 왠지 시간에 맞출 수 없을 것 같았다. 책을 읽는 데는 자신이 있었다. 지금까지 나름 수없이(?) 시험을 쳐오면서 생긴 이해력과 암기력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수학의 정석이 중학교 과정의 교과서나 일반 책과는 수준 자체가 다르다는 걸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