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돌보는 첫 걸음
감정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현상이나 일에 대하여 일어나는 마음이나 느끼는 기분'이다. 동양에는 희노애락(오욕구)의 대표적인 감정 분류가 있고, 심리학자 로버트 플러는 수용/분노/기대/혐오/공포/기쁨/슬픔/놀라움 등 8가지로 기본적인 감정을 나누었다. 어떤 연구자들은 감정의 수란 제한이 없고, 개인이 경험에 따라 주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기에 분류 자체가 의미가 없다고도 한다.
감정의 정의를 보면, 마음, 기분 등에 대한 정의가 또 필요하다. 대체 마음은 무엇이고, 기분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감정은 사고와도 다르고, 감각과도 다르다. 우리는 모두 언어적 정의를 뛰어 넘어, '감정'이라고 하면 '으응, 그거지'하고 떠올리는 것들이 있다. 고대하던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 가슴이 벅차오르며 웃음이 터져나오고 한껏 고양되는 그 상태, 애인과 헤어졌을 때 가슴이 미어지고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은 고통스러운 상태, 누군가 나의 부모에게 심한 욕을 했을 때 얼굴에 피가 몰리듯 뜨거워지고 심장이 벌렁대듯 몸이 끓는 냄비처럼 달아올라 폭발이라도 할 것 같은 그 상태. 그런 것들이 '감정'이 올라올 때 개인이 겪는 체험들이다. 그런 신체적 상태로 나타나는, 내적인 마음의 순간적인 작용을 우리는 감정이라고 부른다.
감정은 '자극'에 의해 촉발된다. 혼자 있어 심심하건, 애인과 헤어지건, 친구에게 욕을 듣건, 아름다운 것을 보건, 자극이 있을 때 '신체적' 반응이 일어나며 그것을 개인이 인지하는 과정에서 감정에 이름을 붙이게 된다. 심장이 덜컥하는 듯한 반응이 일어나면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은 느낌'을 느끼며, '놀랐다'라고 내 감정을 인지한다. 감정 프로세스에는 촉발한 [자극]과, 이로 인한 [반응], 그리고 그 반응이 어떤 감정과 연결되는지를 알아채는 [인지]의 과정이 포함된다. 예를 들면,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으면(자극), 눈이 커지고 몸이 멈칫하면서 근육이 잠시 긴장되었다가, 심장이 빨리 뛰는 등의 신체 반응이 나타나고(반응), '기쁘다'는 인지를 거치면서 실제로 소식을 듣고 '기뻐하게' 된다.
그런데 때로 '나는 내 감정을 모르겠어요. 감정이 없는 것 같아요' 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감정이 없다기 보다는, 자극에 의한 반응은 있지만, 이것이 어떤 상태인지 매칭되지 않는 '인지'과정에 문제가 있는 경우이다. 신체 반응상으로는 근육이 긴장하거나, 배가 아파오거나, 두통이 오거나, 심장이 뛰는 등의 반응이 분명 있음에도, 이것이 '분노'인지, '혐오'인지 등을 알지 못하는 셈이다. 그래서 치료실에서는, 신체 반응을 잘 관찰하여 피드백을 주거나, 자신의 신체 반응에 주시하고 이것을 감정에 연결지을 수 있게끔 돕기도 한다.
주로 게슈탈트 치료에서 많이 언급하는 내용인 것으로 알고 있다. 게슈탈트 심리치료에서는 나의 욕구나 신체반응을 주시하고 '알아차리는' 과정을 중요시 여긴다. 그런데 학자에 따라서는, 자극->반응->인지 의 순이 아니라, 자극->인지->반응 의 순으로 감정 프로세스가 돌아간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모든 일은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나 일체유심조와 관련된 부분이기도 하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도 있다. 개인의 경험이나 기억에 따라, 자극을 자기만의 정보로 인지하여 실제로 솥뚜껑이라 놀랄 일이 아님에도, 놀라움이나 공포로 반응하는 경우는 분명, 인지과정이 반응보다 앞서 있다.
위의 이야기들은, 사람이 기본적으로 '감정을 인지하는 과정'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감정 알아차리기]는 이보다는 더 정신적인 작용을 뜻한다. 당신의 진짜 감정을 알고 있습니까? 같은 질문에서 연상되는 과정 말이다. 생각보다 자기 감정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부모에게 늘 혼나고, 책망의 말을 들어온 사람이 있다. 그는 늘 가슴 한 켠이 묵직하고 답답하다. 부모를 떠올리면 그는 속부터 답답해진다. 가슴이 꽉 막힌 것 같다. 그는 부모를 떠올리면 어떤 느낌이세요?라는 질문에 '답답해요'라고 말한다. 답답한 것은 감정이 아니다. 신체 반응의 묘사이다. 그가 답답한 이유는, 부모가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아 슬프기 때문일까, 화가 나기 때문일까? 그가 부모에게 갖고 있는 감정은 분노일까? 슬픔일까? 혐오일까? 자신의 감정을 모른다는건 이런 경우를 가리키는 것일게다.
자신의 감정을 잘 알지 못하면, 스스로 자기를 돌보기 힘들어진다. 나의 상태를 알고 적절한 대응을 취해주어야 하는데, 내가 화가 난건지, 두려운건지 잘 모른다면, 나에게 필요한 것을 취할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돌봄이란,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것을 포함한다. 스스로 감정을 몰라 자신에게 뭘 제공해야 하는지를 모른다해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본능적으로 요구하는 바가 있어, 자기도 모르는 특정 사고나 행동을 하게 된다. 자기 안에 분노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진 못하지만, 이상하게 주변 사람들에게 공격적으로 대한다거나, 혼자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사랑받고 싶은 외로움이 있다는 것을 모르지만, 주변인에게 끊임없는 관심을 요구하며 쇼를 하듯이 자신을 포장하거나 주목 받을만한 사건을 자꾸 만들 수도 있다. 셀카 등을 올리며 서로 박수 쳐주는 생리를 갖고 있는 SNS도, 자기 감정을 잘 모르게 하는 것에 일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SNS에서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이 즐겁고 기쁘다'가 진정한 감정 상태일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것처럼 느끼는, 그 뒤의 외로움이나 인정 받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두려움이 진짜 감정이라면? 잘 생각해 볼 일이다.
내 감정을 잘 알아차리는 것은 나 스스로를 돌보기 위한 첫걸음이다.
나의 신체 반응을 주시하고, 내가 어떤 상태인지(긴장해있다, 편하다, 흥분했다 등)를 감정과 매치해본다. 화가 난다면, 왜 화가 나는지를 생각해본다. 화가 날만한 일인지도 반문한다. 나는 어떤 경우에 이런 감정을 일으키는 경향이 있구나-라고 스스로를 관찰한다. 이는 메타인지의 영역이다. 이렇게 해보는 이유는, 나를 불편케 하는 감정적 패턴에서 벗어나 보다 편해지기 위해서이다. 장애물이 놓인 길에서 장애물을 치워내고 편히 길을 가기 위해서는, 그 길을 자세히 보고 장애물을 들어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후다닥 지나가면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가시덤불에 찔린다. 그리고 넘어지면 넘어지는대로, 찔리면 찔리는대로 또 성내고 아파하느라 길 자체를 보지 못한다.
감정은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무엇이다. 삶은 감정들의 연속된 집합처럼 느껴진다. 좋은 감정만 느끼고 살 수는 없지만, 내 삶의 길에서 주변의 풍경이나 옆길을 걷는 사람들을 쳐다보기도 하는 여유를 가지려면, 감정의 길 자체가 '걷는 행위'를 힘들게 할만큼 거친 것보다 적당히 걸을만한 길인 편이 나을 것이다. 길을 고르게 다듬으려면 길을 쳐다보고, 내 감정의 돌멩이나 가시덤불을 치워낼 수 있어야 한다. 감정 알아차리기는, 내가 걷는 길이 어떤 모양인지, 어떤 것을 치워내면 걷기 좋은 길이 될지를 알기 위해 필요할 것 같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