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영의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고
초등학교 4학년 담임선생님은 결혼한지 얼마 안 된 여자 선생님이었는데,
우리때가 그 학교 첫 부임이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당시 우리집은 오거리에서 만두가게를 했다.(국민학교 시절이다..)
젊은시절 등산과 낚시를 좋아하시던 아버지가 체육사를 차렸다가 망했고,
다음에 차린 만두가게였다.
어느날 선생님은 주소를 적어오라고 하셨다.
나는 그당시 어린마음에 그 오거리에 주주륵 몰려있는 가게에 주소가 있을턱이 있을까 생각했었고
부모님께 주소를 묻지 않았다.
주소를 제출하라고 했던 그 날.
나는 주소를 제출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집 주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단칸방에 네명의 가족이 함께 살고, 만두가게에 주소가 있을리가 없잖아..
(이건 순전히 어린이었던 나의 생각)
선생님은 한명이 주소를 내지 않았다며, 누구냐고 물었고
나는 나서지 않았다.
선생님은 점점 더 화가 나셨던 것같다.
그래서 한명한명씩 확인해갔다.
그리고, 주소를 적어내지 않은 것이 나라는 것이 밝혀졌다.
선생님은 나를 교실앞으로 나오게 한 후 반 친구들이 다 보는 앞에서
엎드리라고 한 후 나무 몽둥이로 엉덩이를 힘을 줘서 몇대 때렸다.
챙피하기도 하고, 아프기도 했다. 그리고 수치심
나는 끝까지 부모님께 맞았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주말이 왔다.
주말에는 엄마와 함께 꼭 동네 목욕탕을 가는 날이다.
엄마는 내 엉덩이의 피멍을 보시고 나를 추궁하셨다.
그렇게 내가 주소를 적어내지 않은게 밝혀지고, 엄마는 월요일이 되자마자
학교로 김치 한통을 싸들고 가셔서 선생님께 헌납했다.
그게 그렇게 4학년짜리 아이를 반 아이들앞에서 엉덩이를 때릴 만큼 큰 잘못이었을까.
엄마가 된 나는 다시 그때의 나의 엄마를 생각하게 된다.
엄마는 얼마나 화가 났을까, 잠을 이룰수 있었을까,
그렇게 약자였던 학부모였던 엄마의 최선은 김치 한통이었다는게 계속해서 슬펐다.
지금까지 계속 선명한 기억으로 이 일이 계속 생각나는 건,
아마 그 선생님을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 이후에 선생님은 나에게 미안했던지 잘 해주셨고,
어린이었던 나는 그 마음을 풀어, 선생님께 잘 보이겠다고 체육사했을때 남았던 텐트봉을
선생님의 지휘봉으로 헌납했다.
선생님은, 텐트봉으로 한 남자아이를 엄청 두들겨 팼고, 아이의 엄마는 교육청에 그 선생님을 고발했다.
막대기를 갖다준 것에 대한 죄책감도 있었는데
나는 선생님을 옹호했다.
이미 나를 매로 지배한 선생에 대한 충성심이었을까.
어른들 사이에 어떤 거래가 오고갔는지 모르겠지만, 그 선생님은 교편을 놓치 않았다.
계속해서 우리를 가르쳤다.
그렇게 5학년이 되었고, 선생님은 아이를 낳고 이사를 가셨다.
4학년때 단짝친구와 함께 안양에 있는 선생님의 집까지 음료수를 싸들고 방문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로 시간을 돌려서,
우리 엄마가 그 선생님을 교육청에 고발했더라면 어땠을까. (전.선.희. 선생)
폭력은 어떤 형태로든 정당화될 수 없다.
그 이후에 나는 학교에서 맞는 매가 두려워서 최대한 그것을 피하기 위해 엄청 노력했던 것 같다.
사랑의 매라는 것은 없다.
그게 학교든 가정이든.
어렸을때 경험한 폭력은 어떤 형태로든 마음에 남아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가끔 나를 그때의 어린시절로 데려다 놓는다.
'어린이라는 세계'에서 김소영 작가가 초등학교때 강강수월래를 배우며,
잘 못한다고 선생님께 복도에서 내동댕이 쳐졌다고 쓴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때의 내가 생각났다.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고,
꿈꾸는 유목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