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마라톤대회 초등4학년 아들과 함께

by 꿈꾸는 유목민


뉴질랜드에서 처음으로 마라톤 대회에 참여했다. 작년 11월 제주 감귤 마라톤 대회에서 하프를 달린 후 처음 공식대회였다. 뉴질랜드에와서 혼자 달리려고 하면 아이를 어디다가 맡기는 게 부담스러워 신청을 하지 않았다고 혼자 위안했다.


계속 미루고 미루다가, 페가수스 지역에서 열리는 마라톤 대회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하프마라톤대회라 풀코스는 없었다. 혼자 하프를 달리러 갈까 하다가, 아이에게 밑져야 본전으로 물어봤다.



"지난 번, 학교에서 캠핑갔던 곳 알지? 그 근처에서 마라톤 대회하는데 10km 도 아니고 9km 대회가 있데. 엄마랑 같이 달려볼래?"


무조건 안하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아이는 왠일인지, "그럴까?"라고 했다. 혼자 달리는 것보다 함께 9km 를 달리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 해서 같이 등록을 했다.


방학을 12월 12일에 하고, 12월 14일에 마라톤대회에 갔다가, 12월 16일에는 멜번 호주 고모댁으로 가면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더 큰 일이 끼어들었으니, 바로 '이사'이다.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일이 '배우자의 죽음' 다음으로 '이사'라고 했는데, 가뜩이나 이벤트가 이어지는 12월인데, 더 큰 이벤트를 끼어넣었다.


호주에 가기 전에 이사 뿐 아니라 살고 있는 집 정리까지 모두 하고 가야 하는 상황이라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지면서 결국 극 P 성향인 나는 이 상황을 회피하느라 바뻤다. 그래도 이사는 해야하니, 이사 들어가기로 한 집에 살고 계신 분이 먼저 짐을 집에 옮겨놔도 된다고 해서 강제로 짐을 싸야했다. 그래도 잡동사니들이 몇 박스 더 나올듯하다.


1월 24일에 호주에서 뉴질랜드로 재입국하면서 바로 새로 살게 될 집으로 들어가야해서 전기와 인터넷 신청도 다시 해야한다.


마라톤이 문제가 아니라 이사와 호주 한달살기가 더 큰 이벤트였다. 하지만 마라톤도 벽돌깨기해야하는 하나의 이벤트임에는 틀림없었다. 헤글리공원에서 5km 달리기를 몇 주 이어서 하고 있는데, 나와 둘이 달릴 때는 속도가 8분대도 안나오던 아이가 친구들이 등장하자 5분대로 신기록을 세웠다. 5km 를 30분도 안되서 들어오다니, 희망이 보였다. 아이와 같이 마라톤을 신청했을 때는 기록은 상관하지 않기로 한다는 다짐도 포함되어있었는데, 그걸 살짝 기대해도 됐다.



오늘 마라톤을 하기 전에 9km를 정식으로 달려보고자 헤글리파크에서 달렸는데, 불평하지 않고 달리더니 6분대 중반이 나왔다.

그날 아이에게

"너의 열살 인생에서 가장 멋진걸 이룬 날이야!"라고 해 주었다.

정말 그랬다.


어쨌든, 마라톤 티셔츠가 배달왔다.


뉴질랜드는 한국과는 달리 마라톤 옷을 따로 사야하는데 그 비용이 만만치 않다. 그런데 우편으로 배달된 옷은 아이와 내가 입기에 너무 컸다. 그리고 촌스럽기까지.


오늘 드디어 캔터베리 페가수스 마라톤의 날이다. 전날 컨디션을 관리하기 위해 9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잠자리에 바로 들기 전 윗층에서 심한 부부싸움 소리가 들렸다.


문득 작년 제주 하프마라톤이 열리는 날 새벽 2시부터 4시까지 격렬하게 싸우시던 옆집 부부싸움소리가 생각났다.

우연이겠지. 다행히도 싸움소리는 금방 멈추었고, 안정을 찾았다.


아이도 잘 자고 일어났고, 나도 가민와치가 8시간, 98점 수면점수라고 알려줬다.


간단하게 달걀을 삶고, 사과와 블루베리를 쌌다. 아이는 마라톤 대회에 먹겠다며 샀던 에너지 젤을 챙겼다. 집에서 30분정도 걸리는 페가수스 마라톤 대회장에 1시간 전에 도착을 했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주차도 수월하게 한 후 길게 늘어져있는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나왔다.



아이는 가져온 에너지젤을 아끼다가 바닥에 떨어뜨린지도 몰랐다. 놀이터에 있는 에너지젤은 터져서 반 정도 사라졌지만 먹겠다고 하더니 쪽쪽 빨아먹었다. 무슨 맛인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하프를 달리는 사람들이 9시에, 9km 달리는 사람들이 9시 15분에 출발했다. 각 코스마다 하이브리드가 있는게 특징이었다. 즉, 걷기와 달리기를 함께 하겠다고 신청한사람은 번호표 색깔도 다르다.


물은 3km 지점마다 준비되어있다고 했는데, 절대 바닥에 버리지 말아달라고 몇번이나 강조를 했다. 쓰레기가 호수에 날아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작년에 제주도에서 참여했던 두 번의 마라톤에서는 물을 마시고 바닥에 버리면 자원봉사자들이나 줍깅을 신청한 사람들이 쓰레기를 주워주었다. 생각해보니 러너들이 버린 쓰레기들이 아름다운 제주바다로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뉴질랜드 페가수스 마라톤 러너들이 제주 마라톤 대회에 참여한다면 기함을 할 노릇일게다.


마라톤이 시작되고 아이와 내가 달리기 시작했다. 평소페이스보다 빨랐다. 아이는 내가 발맞춰달렸다. 신기하게도 아이는 아프다, 힘들다는 소리도 하지 않고 내 옆에서 묵묵히 달렸다.


차에서 듣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를 이어듣기도 하고, 잠시 멈추기도 하면서 달렸다. 페가수스 마을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중간중간 서 있는 마샬들이 응원을 신나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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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가 조금씩 쳐질때마다 내가 먼저 앞서서 달리니 아이가 용케도 나를 따라왔다. 속도가 좀 빨라진다 싶으면 아이가 "엄마"라고 살짝 외치고, 나는 다시 아이에게 보조를 맞췄다.


약 5km 지점에서 아이가 조금 많이 뒤쳐졌는데, 뒤를 살짝 돌아보니 정식 코스가 아니라 지름길로 가로질러 오는게 보여서 발끈했다.


"그런건 어디서 배운거야? 스포츠는 페어플레이야!"

눈치보던 아이가 자기가 잘못한 걸 알았는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따라가기 놀라운 속도였다.



약 1km 남은 지점에서 뒤에서 두 사람이 달려와 나와 아이를 앞질렀다. 티비에서 보던 장면이었다. 눈을 못보시는 분이 대회에 참여했고, 손에 빨간줄을 매고 가이드가 함께 달려주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가세요. 이제 코너를 돕니다.."


아이에게도 나중에 설명해주었다.



페가수스 마라톤을 하기 며칠전부터 김연수 작가님의 <지지 않는다는 말>을 읽었는데, 달리기에 대한 생각을 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왜 달리기를 했을까? 그냥 건강을 위해서 시작했다. 단순한 이유였고 거창한 이유는 없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달리기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싶었다.



작가는 "달리기는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시작할 때 그렇지 않다면 끝날때는 반드시 그렇다"라고 했다. 어쩌면 달리기, 그리고 마라톤은 시작할 때보다 끝날 때 어떤 기분인지 알기 때문에 계속 하는게 아닐까 싶었다.



달리면서 깨닫는 생각들을 아이에게도 심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달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냐고 아이에게 물어봤더니 "그냥 아무 생각 안났는데?"라고 했다. 음.. 그러면 굳이 아이에게 달리는 의미를 설명해주지 않아도 될것 같았다.


달리는데 생각이 복잡하면 달리는게 더 힘들어질수도 있다. 그냥 아무생각 없이 달린다는 아이의 말이 정답일 수도.


마지막 2km 를 남겨두고 아이가 "엄마, 나 똥 마려워"라고 했다.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매번 있는 일이라 그냥 못들은척하고 달렸다.


1km를 앞두고 옆구리가 심하게 당기기 시작했다. 옆구리를 부여잡고 뒤쳐지지 않기 위해 달렸는데 힘들었다. 아이에게 런데이가 켜있는 휴대폰을 건네주고 전력질주를 하라고 했다.


아이는 나보다 훨씬 앞서서 finish line을 통과했다.


아마 최고 기록일꺼다. (휴대폰 런데이 앱을 끄지 않아서 정확한 기록을 알수가 없으나 9km 를 6분 2초대로 들어왔을 것이다)



시작할때는 힘들었으나, 끝나고는 넘 좋았다.

바람도 좋았고, 한층 더 성장한 아들의 표정도 좋았다.

어젯밤 아들을 보면서

"꿈유의 아들로 태어나서..."라고 내가 운을 띄웠더니

아들이

"힘들지..."라고 해서 많이 웃었는데, "힘들다"라는 말 안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있을것이다.


아이가 경험하는 것들은 대부분 내가 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로망을 실현하는 과정일 수 있지만, (심리학자 융도 그렇게 말했다) 거기서 더 한발 나아가서 아이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주는 과정이기도 하다. 물론 어린시절 내가 원했던 걸 엄마가 되어서 아이덕분에 경험하고 있기도 하고.


제주도 관광마라톤 대회에서는 달리는 것 보다는 달리고나서 먹는 전복죽과 겉저리가 일품이었고, 감귤마라톤 대회에서는 대회참가자들에게 귤을 한박스씩 나눠주었다.


뉴질랜드 마라톤대회에서 그런 재미는 없다. 우리끼리 달렸고, 기록증은 따로 없다. 이쁜 메달을 받아서 집에 왔다. 9km 마라톤을 성공적으로 끝낸 아들의 얼굴을 보니 뿌듯함이 배어있다. 가는 길에 코스코에 들려서 과자를 사달라는 말에, "오늘은 먹고 싶은 거 다 말해"라고 해 주는 엄마.


"집에 와서 12월 25일에는 크리스마스 기부런 12.25km 달릴거야."라고 말했더니, 아들이 기겁을 한다.

그러더니 포기한듯

"걸어도 되는거지?"를 여러번 반복한다

"그래, 그건 12.25km를 채우는게 의미가 있는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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