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빼로데이 그녀

by 아차산호랑이

'신은 존재하는가' '사후세계는 있을까' 등과 같이 세상엔 참거짓을 판단하기 어려운 명제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운명론'이 아닐까 싶다.

특히나 연애경험이 적은 어린 나이일 수록 나의 운명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높은 것 같기도 하다. 나도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운명이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를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사랑과 이별의 반복의 경험이 어느정도 쌓인 지금 운명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면 어쩌면 운명이라는 것도 결과론적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생각이 들게 만든 하나의 사건이 있었으니...


때는 11월 11일 빼빼로데이 저녁, 지하철에서 술에 잔뜩 취한 그녀는 내 어깨에 기대 잠들어 있었다. 술을 마시지 않은 나는 과제 때문에 읽어야 했던 책을 급히 읽고 있었고 잠에서 깬 그녀가 내게 무슨책을 읽냐고 물었다. '프랑켄슈타인'이라고 쓰여 있는 책 제목을 보자 그녀는 피식 하고 웃었다. 곧 그녀가 내릴 역에 도착하였고 그녀는 술이 많이 취했는지 심하게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걱정된 나는 일단 비틀거리는 그녀를 부축하여 함께 지하철에서 내렸고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 주기로 마음 먹었다.

사실 그녀는 20분전 지하철에서 처음 본 여자였다. 책에 빠져 있어서 모르는 사람이 내 어깨에 기대어 자고 있는줄도 몰랐다. 밤늦은 시간에 술에 만취해 비틀거리는 그녀가 걱정되어 같이 내렸다. 집이 어디냐 물으니 다행히 어느 아파트 몇동 몇호까지 힘들게 얘기를 해주었다.


제대로 몸도 못가눌 만큼 술에 만취해 겨우겨우 부축하여 그녀가 말해준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 그녀는 잠시 술을 깨고 집에 가고 싶다하여 벤치에 앉았고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무언가를 계속 말하길래 가만히 듣게 되었다. 내용인 즉, 꽤나 오랫동안 사귄 남자친구가 있는데 바람이 나서 빼빼로데이인 오늘 헤어졌으며 너무 괴로워 혼자 술을 마시고 집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한시간 동안 전남친과의 만남부터 헤어진날까지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내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으나 그녀는 남자를 무척이나 사랑했지만 남자는 그녀에게 점점 마음이 식어갔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빼빼로데이날 빼빼로는 못받을 망정 차였다'며 우는 그녀를 보니 나도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 그날 친한 후배가 줬던 빼빼로 하나를 가방에서 꺼내 그녀의 가방 속에 몰래 넣어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술이 점점 깼는지 그녀는 갑자기 당황하더니 죄송하다며 왜 자기가 모르는 남자랑 같이 집 앞까지 와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사과를 하고 급히 인사를 하고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감사하다고 다음에 꼭 사례를 하겠다고 내 연락처를 받고 급히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집으로 돌아가던 나는 빼빼로데이날 우연히 지하철에서 만난 그녀에게 호감이 생겼다는 것을 느꼈고, 곧 연락이 오면 더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운명이구나' 라고 생각하며...


그 다음날 그리고 그 주까지 이상하게 난 하루종일 그녀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에 꼭 사례를 하겠다던 그녀의 연락은 몇년이 지난 지금까지 오고 있지 않다.

그래.. 운명이 아니었거나 운명은 없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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