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모? 학생?
자녀가 학교에서 어떻게 보낼지 걱정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자녀에게서 어떤 징후를 발견했거나 아니면 학부모가 학교에 대한 좋은 추억이 없거나.
아이들은 단체생활을 학교 입학으로 시작한 게 아니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이미 거쳐왔다. 문제의 징후를 양육자가 발견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는 의미이다. 더불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간 또한 다년간 있었던 것이다. 학교 입학 내지는 새 학기에 대한 불안은 발견한 징후가 적절히 해결되지 않았음을 의미하거나 부모 본인의 흑역사 가득한 학창 시절이 떠올랐음일 것이다.
적응에 대한 어려움이라면 자녀가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지원과 격려가 필요하다. 학교란 공간에서 많은 이들과 어울림이 매번 순탄할 수는 없다. 그렇다 하여 모든 아이들이 학교를 공포스럽게 여기지는 않는다.
선택적 함구증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그것은 모르겠다. 양육자는 자녀가 조금 소심하다 여겼을 뿐 선택적 함구증이란 용어 자체도 생소해했다. 딸 셋 모두가 그러했고 본인도 어릴 적에 비슷했다 했다. 어쩌면 이것이 자녀의 이상함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이유겠다 싶었다.
관련 논문은 양육자도 아닌 내가 찾아보았다. 결론적으로 축약하면 원인은 다양하며 치료는 만 10세를 넘지 않아야 한다 했다.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었다. 물론 학부모는 자연스레 개선될 것이라 대수롭지 않은척 했다.
한 동안 납득하지 못했던 사건은 선택적 함구증 학부모로부터 시작되었다. 1교시 시작 전 딸이 잘 지내냐기에 관찰한 모습과 좁은 교우관계를 말하며 아무 문제 없이 웃는 목소리로 끝났다. 2교시 끝날 무렵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 무슨 할 말이 남았나 싶어 연락을 했더니 조금 전 통화했던 학부모가 울며불며 난리가 났다. 두서없는 이야기로 종잡을 수 없었지만 속상하다와 서운하다는 낱말이 계속 반복되었다.
네버엔딩 스토리를 끊어어 했고 이 알 수 없는 사건도 마무리해야 했다.
교실로 오라 했다. 불안해하는 것이 딸이라면 어떻게 지내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라 했다. 창문을 열어둘 테니 와서 보라고 말이다.
3교시 중반쯤 복도 불투명 유리창으로 기웃거리는 실루엣이 보였다. 난리 친 학부모임을 알아챘다. 모둠별 활동을 평소처럼 진행했고 아이는 말만 하지 않았을 뿐 아이들과 함께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쉬는 시간 부모를 연구실에서 보자 했다. 차 한잔 권하니 대뜸 미안하다 사과를 한다. 난리도 사과도 참 맥락 없이 하지 싶었다.
그때는 이 학부모가 왜 이리 냉탕과 온탕을 넘나드나 했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자식이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불안함과 자신의 학창 시절 경험이 오버랩되며 시너지 효과를 냈지 싶다.
양육자의 학창 시절이 흑역사라 해서 지금도 그런 일이 반복된다는 판단은 분명 오류다. 그 시절 수준 이하의 교사들은 나 또한 겪었음에 이의를 달 생각은 없다. 현재도 그런 자질 미달의 교사가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언제 어디서든 있으니만 못한 존재들은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과거 경험에서 비롯된 막연한 불안함과 불신을 자녀에게 옮겨주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일지는 생각해 볼 문제다.
학교를 가는 당사자인 아이, 이를 지켜보는 초조한 학부모 모두 학교 적응기에 속하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