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자연스레 철들게 하지 않는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은 점심을 준비하지 못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우린 십시일반으로 도시락 뚜껑에 밥과 반찬을 나누었다. 그 어린아이들이 이렇게 점심을 나눈 반면 그 당시 담임교사란 자는 학생들에게 반찬을 걷어 풍요로운 한 한 끼를 해결하고 있었다. 1년간 단 한 번도 자신의 도시락을 굶는 학생들에게 나누어준 꼴을 본 적이 없었다. 어렸던 나의 눈에도 저렇게 꼴불견인 나이 든 사람이고픈 생각은 없었다.
며칠 전 현금 도난 사건이 있었다. 아이들이 달려와 한바탕 재잘거리고 지나갔다. 학교 cctv를 확인하니 도난으로 의심되는 장면이 목격되었다. 의심되는 아이의 신원도 이튿날 파악되었고 아이는 도난 행위를 순순히 인정했다.
처리과정에서 관리자와 실랑이를 하느라 엄한 에너지를 쓰는 헛짓거리에 적잖이 불편했던 것도 사실이다. 책임을 질 것도 아니고 문제 해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도 않을 것이면서 왜 그리 참견질인지 납득이 안되었다.
나의 의지대로 사건은 잘 마무리되었다. 양측이 만나는 상황을 만들지 않았다. 사정을 우리 반 피해자 학부모에게 이야기하고 도난당한 5천 원은 일단 내 지갑에서 충당했다.
난 아직도 그 아이의 얼굴은 모른다. 돈을 가져간 아이 담임 말에 따르면 "왜 남의 가방을 열고 돈을 가져갔어?"라는 질문에 군것질이 하고 싶어서 그랬단다.
주양육자가 부모가 아니란다. 시설에서 시설로 옮긴 아이란다. 덩치가 산만하다 해도 아이는 아이다.
이 녀석은 살면서 무슨 기쁜 일이 있을까 싶었다. 타인의 돈을 가져간 것에 정당성이나 서사를 부여하고픈 생각은 없다. 다만 그 녀석이 처한 현실이 짠할 따름이었다.
난 자라면서 겪지 못한 시설이 어떤 충격인지 가늠하지 못한다. 단지 온전한 보살핌이 아닐 것이란 막연함 뿐이다. 남들과 뒤섞여 사는 삶은 필히 눈치를 과할 정도로 볼 수밖에 없다.
돈을 쓰고 그것을 입에 넣는 그 짧은 달콤함이 이 녀석 삶에 유일한 달달함이면 어쩌나 싶었다.
편의점에서 사용할 수 있는 카드를 사서 돈을 약간 충전했다. 그 아이 담임에게 건네며 내가 줬다는 사실은 말하지 말아 달라 했다. 가르치면서 그 녀석에게 건네는 당근으로 써달라 했다.
당근과 채찍을 분명 쓰고 싶겠지만 그 녀석 입장에서 지금까지의 삶은 당근은 보이지 않고 채찍만 가까웠을 것이라 말했다. 같은 일은 분명 또 반복될 것이니 단번에 고쳐지리라 실망이 예고된 기대는 하지 말라 당부했다.
내 포지션에서만 바라보면 명백한 징계 절차를 밟는 게 맞다. 피해 학부모에게 돈을 가져간 아이의 사정을 말한 이유는 그렇게 칼같이 선을 긋는다 하여 개선되지 않는 문제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관리자는 절차를 걱정했고 난 파생되는 최악의 경우에 수를 고심했다.
역지사지는 아니다. 그저 난 잠깐 그 녀석의 입장에서 아주 짧게 세상을 바라본다는 가정을 했을 뿐이다. 매몰찬 세상만 마주했던 아이에게 그래도 누군가 한 번쯤은 손을 내밀어주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을뿐이다.
나의 유년시절에 겪었던 그런 철없는 어른은 아니고 싶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