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heajigi Feb 24. 2024

나란 존재

찰나


 살아감은 찰나이다. 연이어 벌어지는 사건과 수많은 사고 속에서 나는 극히 짧은 현실과 긴 과거에 존재할 뿐이다. 내가 아는 나와 남이 아는 나는 언제나 현재가 아닌 과거를 재생할 때 드러난다. 물론 거기에 많은 왜곡이 따라옴도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내 안에 내가 존재함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무슨 유체이탈 화법이냐 반문할 수도 있다.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내가 나를 인식하려 애쓸 때나 비로소 나에 대한 존재감을 느끼고 있음을 알아챌 것이다. 흔한 말로 너무 바쁠 때 우린 정신이 하나도 없다며 입버릇처럼 말한다. 나조차도 내 자신이 있음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의미임을 내뱉는 말이다. 이지경에 이르면 내가 일을 하는 것인지 일이 나를 부리는 것인지 헛갈리곤 한다.


 나를 내가 잘 알 것 같지만 등잔 밑은 늘 어둡기 마련이다. 남이 본 내실체가 종종 비수처럼 날아들기도 하니 말이다.

 내 안에 내가 너무 고집이 세면 누군가와 불협화음이 잦다. 다른 사람 안의 내가 과도하게 크면 매사에 눈치를 보기 마련이다. 적절함을 유지하면 되지 않겠냐 말은 쉽지만 밸런스 맞추기가 그리 쉬운 것이라면 균형이란 낱말은 필요성이 없기에 절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내 안에 나도 제대로 스캔이 안되는 마당에 타인 속의 나는 실체를 파악하기 더욱 어렵다. 면전에서 독설을 날리는 오만방자한 자들이 가끔 있지만 대부분 정상 범주의 사람들은 속내를 숨기기 마련이다.

 

 나에 대한 실체를 안다하여 개선이 쉬운 것도 아니다. 내가 부족한 나와 마주하며 실상을 인정하는 데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몸은 늙어가나 생각은 상응하는 만큼 커지지 않은 이들을 우린 주위에서 흔하게 발견한다.


 나란 존재가 완벽하지 않음만 확고하게 유지하려 한다. 내 안에 나를 되돌아보고 개선할 요소를 찾아내었으면 싶다. 베풂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나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는 일만이라도 줄여갔으면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가해자 예찬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