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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heajigi Mar 09. 2024

지향점을 잃다.

한계인가?


 가정과 일은 언제나 양립했다. 이 두 가지가 한데 묶일 수도 없을뿐더러 공평하게 양립하기도 힘들다. 비중은 언제나 가정이 컸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 반드시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가족에 대한 우선이나 바라는 바는 언제나 변함이 없지만 말이다. 무탈하고 평온하기를 항상 바라왔고 유지하려 애를 쓴다.

 직장은 좀 달라졌다. 이런저런 사건도 겪었고 세상도 예전처럼 하면 절대 안 됨을 강하게 푸시했다. 새롭게 중심을 잡고 가야 하지만 안갯속이기에 흔들린다. 언제까지 일지 그것도 모르겠다. 해오던 습관을 바꾸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내 안에 구습을 지워버리니 목표도 상실하고 배회한다. 지향점을 잃었으니 동력이 사라짐도 당연한 수순이다. 버티고는 있으나 글쎄이다. 이번처럼 개학이 불편하고 두렵기는 처음이다. 학창 시절도 이렇게 개학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 학생도 아닌 교사이면서 자다 깨다를 반복하고 숨쉬기 답답할 정도로 가슴이 먹먹했다. 내 자신이 처량하고 난감했다.


 꽤 오랜 기간 더 나은 교수법을 찾는다고 논문도 수없이 뒤적이고 전공서적들도 사들였다. 이제는 단 한 권의 책도 사지 않았고 관련 논문에 관심조차 없다. 열심히 해봐야 돌아오는 것은 민원뿐임을 알았다. 잘한답시고 부산떠는게 생계인 교직을 위태롭게 만들 일임을 깨달았다. 조용히 잠자코 내버려 둬야 함도 세상이 일깨워 주었다. 더 가르치려 애를 쓰는 일이 명줄을 줄이다 못해 끊을 수도 있음을 미련하게도 너무 늦게 알아챘다.

 이제 뒷짐을 지고 산다.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다. 손이 보이면 뭔가 일을 만들지 모르기에 내 손을 감춘다. 보고도 못 본 척해야만 한다. 그래서일까 점점 더 무기력해져 간다. 가끔 직종을 묻는 체크란은 늘 기타란에 표기한다. 절대 드러내고 싶지 않은 초라한 교사란 직업을 들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버티다 보면 또 길이란 게 보이겠지라는 경험적 막연함에 몸을 맡겨본다. 열정도 마음도 머리도 식었다. 한계치에 도달했나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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