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기준점 1

어쩌나?

by Aheajigi


보고 듣고 겪는 것이 기준점이 되기 마련이다. 학생들에게는 가정이 그러하다. 모든 사람들에게 가족이란 자신을 둘러싼 혈족과 같을 것이라 판단한다. 싸움이 잦은 집에서 자란 아이와 사랑이 넘치는 집에서 자란 아이들은 타인을 대하는 방식이 그래서 다르다.


한 아이가 책상 앞에 우두커니 서 있다. 앉으라 해도 반응이 없다. 지난주에는 복도에 또 그러고 서 있다. 수업이 시작하고도 10여분이 지나서야 겨우 들어온다. 책을 펴라고 했더니 이번에는 사물함 앞에 또 나무처럼 서 있다. 10분이 지나서 앉더니 가위를 꺼내 들고 웃는다. 이번주 월요일은 아예 학교 건물 밖에 서 있다. 내가 말해도 소용이 없기에 아이들을 시켜 데려왔다. 점점 학교로부터 멀어지고 싶은 모양이다. 첫 시간 갑자기 눈물을 흘린다. 교실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기에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 물었더니 언제나처럼 대답도 없다. 하는 수 없이 연구실로 데려가 간식을 입에 물리며 기분이라도 좀 좋아지게 만들었다.


지적 발달이 더딤은 알았지만 이리 정서도 흔들릴지 몰랐다. 작년 담임부터 복지담당, 그리고 특수교사에게까지 도움을 요청했다. 말을 안 하니 내면은 알 수 없고 양육자도 연락을 안 받으니 답답했다. 그 와중에 기초생활수급자인 사실과 양육자가 핸드폰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부모나 환경은 내가 어찌할 사안은 아니다. 개략적 사실을 관리자에게 알리니 가정방문을 하란다. 요즘은 그것조차 학부모가 원하지 않으면 오히려 아동학대로 신고당할 수 있음을 알렸더니 고심만 한다.


간식을 쥐어주며 달달한 맛이라도 느끼게 만들 수밖에 없다. 아이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잿빛인 듯 싶다. 이 아이에게 사는 낙이 무엇이 있으려나 참 안타깝다. 달달한 간식으로 지금은 잠깐의 희열을 느낄지 모르겠지만 앞으로는 어떨지 걱정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무슨 재미로 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