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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heajigi May 16. 2024

기준점 1

어쩌나?


보고 듣고 겪는 것이 기준점이 되기 마련이다. 학생들에게는 가정이 그러하다. 모든 사람들에게 가족이란 자신을 둘러싼 혈족과 같을 것이라 판단한다. 싸움이 잦은 집에서 자란 아이와 사랑이 넘치는 집에서 자란 아이들은 타인을 대하는 방식이 그래서 다르다.


한 아이가 책상 앞에 우두커니 서 있다. 앉으라 해도 반응이 없다. 지난주에는 복도에 또 그러고 서 있다. 수업이 시작하고도 10여분이 지나서야 겨우 들어온다. 책을 펴라고 했더니 이번에는 사물함 앞에 또 나무처럼 서 있다. 10분이 지나서 앉더니 가위를 꺼내 들고 웃는다. 이번주 월요일은 아예 학교 건물 밖에 서 있다. 내가 말해도 소용이 없기에 아이들을 시켜 데려왔다. 점점 학교로부터 멀어지고 싶은 모양이다. 첫 시간 갑자기 눈물을 흘린다. 교실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기에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 물었더니 언제나처럼 대답도 없다. 하는 수 없이 연구실로 데려가 간식을 입에 물리며 기분이라도 좀 좋아지게 만들었다.


지적 발달이 더딤은 알았지만 이리 정서도 흔들릴지 몰랐다. 작년 담임부터 복지담당, 그리고 특수교사에게까지 도움을 요청했다. 말을 안 하니 내면은 알 수 없고 양육자도 연락을 안 받으니 답답했다. 그 와중에 기초생활수급자인 사실과 양육자가 핸드폰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부모나 환경은 내가 어찌할 사안은 아니다. 개략적 사실을 관리자에게 알리니 가정방문을 하란다. 요즘은 그것조차 학부모가 원하지 않으면 오히려 아동학대로 신고당할 수 있음을 알렸더니 고심만 한다.


간식을 쥐어주며 달달한 맛이라도 느끼게 만들 수밖에 없다. 아이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잿빛인 듯 싶다. 이 아이에게 사는 낙이 무엇이 있으려나 참 안타깝다. 달달한 간식으로 지금은 잠깐의 희열을 느낄지 모르겠지만 앞으로는 어떨지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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