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심한 그분과 난 별반 다르지 않았다.
2018-4
꼽혀있는 상장들을 가만히 바라본다. 2013년부터 한해도 거르지 않고 받은 상장과 표창. 학창 시절에도 받지 못했던 장관상들... 받다 보니 처음보다 감흥이 떨어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 문득 최근에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떠오르며 단전부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려서 그런가 뭘 잘 못 알아들어요."
1년 일찍 학교를 들어간 탓에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다고 했단다. 그것이 어머니가 기억하시는 나의 초등학생 시절 유일한 평가였다. 가만 곱씹어보면 모친께서 학교를 방문하셨을 때는 중학교 올라가기 직전인 6학년 때뿐이었다. 그런 말을 들으셨다면 그 시기 밖에는 없었다.
내가 지금까지도 또렷이 기억하는 6학년 담임의 모습은 코끝에 내려오는 안경을 추켜올리며 하루도 빠짐없이 두툼한 책을 보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짧은 두 마디만 했을 뿐이었다.
하나는 "조용히 해!"
다른 하나는 "자습해!"
그분과 만난 한 해 동안 난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50명 넘는 친구들이 이유도 모른 채 쥐 죽은 듯이 조용하게 살아야만 했다.
그분은 항상 두툼한 책에 빠져 있느라 학생들을 온전히 바라본 시간도 거의 없었다. 그런 그가 나에 대해 그런 평가를 했다니 참 기가 찰 노릇이다. (자신을 궁예에 빙의하신걸까? 관심법???)
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장학사 시험을 준비했던 듯싶다. 그 시기 그렇게 두툼한 책은 사전이나 옥편 이외에 별로 없었고 책꽂이에는 독서랍시고 할만한 책들도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자리에 서서 배우러 온 이들을 팽개치는 몰지각한 분을 1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근거리에서 어쩔 수 없이 마주해야만 했다. 그때는 그것이 그릇된 일인지도 몰랐다. 맞고 틀림을 분간할 척도도 아직 자리잡지 않았던 어린 시절이었다.
어느 누구도 나에게 옳음과 그름을 온전히 가르쳐주지 않았다. 명령과 복종만이 있었을 뿐이다. 배워야 할 것들은 한결같이 숙제였다. 공책만 빽빽하게 채워야 하는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학생 개개인의 역량 개발은 꿈도 꾸지 못하거니와 온전한 민주시민으로 생활하지도 못하는 반쪽짜리 백성들을 만든 그분 덕분에 난 마흔이 넘은 지금에서야 북유럽 선진국에서 상당한 문화적 충격을 받고 있었다. 살짝 보이는 틈새로 이제까지 나의 생각이 잘못되어 있음을 티끌만큼 깨닫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이런 형편없는 작자만 아니었다면 더 많이 발전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지나간 이들에 대한 의미없는 원망보다 가르침의 위치에 있는 현재의 나를 오랫동안 깊게 되돌아본다.
"난 그분과 과연 얼마나 다를까?"
흔쾌히 "난 달라!"라고 단정하지 못했다. 분명 무엇인가 더 했는데 왜 쉽사리 그보다 낫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을까!
<프로젝트 학습, 학생 공모전, 나만의 수업모형 개발... >
이런 것들이 표면상으로는 그 한심한 담임보다는 개선되어 보일 수 있지만 실상 깊은 이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난 여전히 학습자와 피학습자의 입장이 같을 수 없음을 간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난 명령하고 학생은 순응하는 스킬을 한심하게 생각하는 나의 담임보다 조금 더 세련되게 포장했을 뿐 근간에 차이는 없었다.
고심 끝에...
최대한 나에게서 학생들로 향하는 강요를 빼보려 했다. 막상 명령질을 빼려 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복종요구가 대뇌피질 보다 깊은 해마에 아주 깊이 자리 잡아 버렸나 싶었다.
개학 첫날 말했다. "No"라고 말할 권리가 학생들에게 있다고 & 하지 않을 권리가 있으니 언제든지 표출하라 했다. 교사인 난 학생들의 의견을 충분히 존중해 주겠다고도 약속했다
익숙치 않은 한 해가 될 것으로 훤히 보인다. 하지만 이는 내가 한심한 담임의 탈에서 벗어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다음 세대가 나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사람으로 자라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 첫발을 내디뎌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