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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로 Oct 21. 2024

결혼과 이혼사이 - 비립종

부부클리닉 상담일지

어렸을 때 어느 날인가 엄마가 빨래를 개는 게 재밌어 보여서 나도 옆에서 알려달라고 같이 갠 적이 있다. 

엄마가 내가 빨래 같이 개는 걸 엄청 좋아하는 것 같았다. 

이후로 엄마가 빨래 갤 때마가 같이 갰는데, 엄마는 점점 나를 혼내기 시작했다. 

양말은 발목이 늘어나니까 이렇게 개면 안돼, 이 옷은 언니 거 아니고 엄마꺼니까 여기 두면 안돼 

등등 점점 많아지는 요구와 잔소리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신기하게 양말을 갤 때면 아 엄마가 이렇게 하지 말랬지 생각이 났고

그 옷을 보면 아 이건 엄마 거지 생각이 들어서 시키는 대로 정리하고 뿌듯했다. 

하지만 잠시 후 엄마는 또 다른 옷을 내가 틀렸다고 했다. 

그리고 난 빨래 개는 것에 흥미를 잃었다. 


'그냥 하지 말아야겠다. 그럼 이렇게 혼날일도 없는데.. '


누누이 말하지만 상대는 나와 똑같은 수준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없다. 

난 그걸 몰랐고 남편에게 매일매일 잔소리를 했었다. 모든 상황에서. 

부엌에 가면 부엌에서의 상황으로,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에서의 상황으로

안방에서도 거실에서도. 

남편도 많이 답답했을 것 같다. 

그 어느 곳에서도 혼나지 않는 곳이 없으니.. 

그렇게 기분이 상한 둘은 대화가 점점 줄고, 당연히 스킨십도 줄고, 

그러면서 서운함과 예민함은 점점 더 커져갔던 것이다. 


남편이랑 크게 싸웠던 게 언제인지 지금은 잘 기억이 안 난다. 

상담받고 직후에도 몇 번 심하게 싸웠던 것 같긴 한데, 

그 이후로 날이 풀리면서 주말에 같이 캠핑도 가고, 

지인들하고 놀러도 가고 했었다. 


부부들끼리 여행 가서 다른 부부들은 어떻게 지내나 보기도 하고, 

남들이 있으니 괜히 더 다정하게 보이려고 서로 노력도 하고, 

집에서만 둘이 지지고 볶고 싸우는 게 아니라 좋은데 놀러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여행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이가 좋아졌다. 


모든 투닥임은 싸움이 아닌 작은 투덜거림 정도로 넘어갔고, 

싸우는 빈도가 잦아드니 자연스럽게 둘은 웃음이 많아지고

스킵쉽도 늘고 서로를 예쁘게 부르는 일이 많아졌다. 

그리고 말투가 다정하게 변하니 내가 부탁한 일도 집안일도 남편은 평소보다 더 잘해줬고 

못해주더라고 고생했다고 꼭 인사를 전해줬다. 

물론 지금도 완벽하지 않다. 

지금 쓴 이 이야기도 몇 년 후 다시 보면 이게 결국 참는 거라고

이러다 곪는다고 잘못된 방식이었다고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적어도 3월에 거의 우울증에 가까운 경험을 했던 나로서는

지금 이보다 더 만족할 수가 없다.


며칠 전 거울을 보는데 오랫동안 오른쪽 눈앞머리에 자리 잡고 있던 비립종이 없어졌다. 

엄마가 눈곱 같다고 당장 피부과 가서 떼버리라고 했는데 

너무 눈 바로 앞이라 무서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게 뭐 큰 문제가 되나? 이거 있어도 사는데 지장은 없잖아?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세수를 하고 나면 꼭 한 번씩 들여다보게 되는 골칫덩이였다.

 

근데 그게 갑자기 사라졌다. 

눈매가 말끔해졌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너무 신기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묵은 체증이 내려간 느낌이었다.


부부클리닉 상담은 그런 것 같다. 


평소 생활에선 보이지 않는 것, 내가 생각하지 못하는 것. 

늘 나와 함께있지만 내 눈엔 보이지 않고 남들 눈에만 보이는 작고 오돌토돌한 비립종.


내 눈에만 안 보일 뿐, 사실 나도 인지하고 있던 작은 돌맹이

치워버리고 싶지만 스스로 치울 수 없고 병원에 가기엔 무서운 마음의 짐


우리는 용기를 내서 부부클리닉을 찾았고, 

내 비립종이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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