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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낳아주신 사랑하는 장모님께

예쁘고 단아하고 아름다운 따님을 낳아 주시고 제게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by 아헤브 Feb 0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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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님 저예요~



장모님께 긴한 마음의 편지 한 통 띄워 드릴 수 있는 저만의 공간이 생긴 이후로,



줄곧 제 마음에 가득한 감사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까를 고민해 왔어요



제 마음의 편지를 드리게 되는 그날이

바로 오늘이 될 것 같습니다.



하얀 빈 공간을 채워 가야 하는 작가의 숙명,



과연 어떤 언어로 제 마음을 이곳에 채워 우리 장모님께 고이 안겨 드릴 수 있을까? 고심되었어요 그러나 이제 시작합니다 제 마음을 강물에 띄워 계신 그곳으로 흘려보내드릴게요.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제가 그토록 가고 싶던 미국에 교환학생으로 합격했을 때, 아내와 저는 아시는 것처럼 친한 선후배 사이였어요



서로의 안부를 이따금 물어가며,

한 교회 내에서 형제, 자매로 서로를 반갑게 맞이하고,



같은 부서에서 때로 함께 봉사도 하면서,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알게 되는 시간을 충분히 가졌던 것 같아요



스물 초반에 아내가 처음 교회에 왔던 그날을 여전히 생생히 기억해요.


예쁜 두 자매, 아내와 처제를 처음 보고, 반갑게 인사말을 건넸던 기억이 나요



운명이 되려고 했던 것인지, 제 마음속 동그란 영사기 안에 필름을 과거로 조용히 되감아 보았더니, 그 무렵 저희 셋이 "인생 네 컷"도 이렇게 찍었더라고요. 저는 이 사진을 자주 가지고 다니고 지금도 종종 들여다본답니다.


브런치 글 이미지 3

그만큼 허물없이 지금의 아내와 처제, 그리고 저는 가끔씩이지만

매우 즐거운 대화를 나누며, 그렇게 함께 신앙생활을 해왔어요  



군에 막 입대하기 전 날,

아내는 제게 마지막 식사를 거하게 대접해 주었어요.



군대 가면 고생한다고, 친구들 보니까 그렇더라고

그리 많지 않은 월급을 탈탈 털어서,

비싼 음식을 제게 대접해 주었어요 그때 제 나이 스물셋이었답니다



입대 후, 자대 배치를 받은 첫날부터 시작된 극악한 괴롭힘 속에서

제가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아내가 편지 쓰기 좋아하는 아는 형제에게

보내준 "백 장 우표" 덕분이었어요



당시만 해도, 군대와 세상이 소통할 수 있었던 것은

"편지"와 "콜렉트 콜"로 대변되는 공중전화 부스였잖아요



아내는 때마다 제게 "백 장 우표"를 담아 편지를 보내 주었고,

저는 그 편지에 동봉된 우표를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편지를 띄울 수 있었어요

그때, 제가 아내의 고운 얼굴만큼 고운 성품을 보게 되었고요 매우 감사한 일이죠.


저는 바다를 지키는 진짜 사나이였습니다!저는 바다를 지키는 진짜 사나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군에서 고생하는 그 친구, 성실한 친구인 것 같던데, 선의로 네가 잘 챙겨줘라"


장모님께서 그리 말씀해 주셨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어요



제대 후 교환학생에 합격했을 때,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장모님께서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을 계속 겪고 있었던 제게 비행기표 사라고 아내를 통해 100만 원이 넘는 돈을 다시 선의로 흘려보내주셨어요



당시에, 후원 편지를 만들고, 그 안에 기도 제목을 담고 많은 분들에게서 미국 잘 다녀오라는 의미로 십시일반의 후원금이 모였지만,



장모님처럼 큰 액수의 금액을 아무 대가 없이 제게 흘려보내 주신 분은 많지 않았어요 그 후로 저는 그때의 감사함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평생 잊을 수 없을 거예요 그리고 계속 되뇌며 저의 할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 어머님의 그 따님이라는 사실을 가슴에 품고 저는 그렇게 미국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누군가와 연애를 하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고

숨구멍으로 영혼이 모두 다 빠져나가 버리는 것 같은 트라우마를 겪었어요

누군가를 너무 사랑했지만 그 일로 저는 만신창이가 되었었죠



오랜 기도로 그녀가 제 배우자일 거라 확신했었는데, 마지막에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고,

하나님 아버지께 마지막 기도를 드리고, 사랑했던 사람을 떠나보낸 후

3개월 동안 가슴앓이를 무척이나 심하게 했답니다.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요 다시 기도를 드렸어요.


저의 배우자는 어디에 있는 건가요?! 주님


열다섯 살부터 배우자를 놓고 오랜 기도를 드렸던 저로서는

어떤 사람을 배우자로 만나는지가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의사 결정이라고 믿었어



대학도, 회사도, 다른 어떤 경험 보다도

제가 내릴 수 있는 선택 중에 가장 숭고하고 중요한 결정은 바로

저와 맞는 아내를 잘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교환학생을 마치고 돌아올 때 즈음,

아내가 기도 가운데 계속 떠올랐고, 저는 용기를 내어,

따님에게 국제 전화를 걸었어요



아내에게 당시에 사귀는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됐다!

이젠 됐다고 혼자 생각하면서, 귀국 후 아내에게 얼마 지나지 않아

고백을 했어요


브런치 글 이미지 5

"낙산 공원" 혜화동에 있는 낙산 공원 위에서 내려오는 길에

우물쭈물하던 저는 아내에게 고백이란 걸 해 버렸답니다.



중간에 우여곡절이 잠시 있었지만,

결국 저희는 양가 부모님의 축복 속에 "성혼서약"을 할 수 있었고

지난 14년 단 한 번도 다투지 않고,

서로 사랑하며, 서로를 끔찍이 아끼며, 누구보다도 더 든든한 지원군으로

곁에 서 있어요. 그 혜택을 기쁨 이가 고스란히 보고 있고요



우리 장모님 덕분이에요

어떻게 따님을 그렇게 키우셨어요

진, 선, 미 그 기준에 모두 부합하는 아름답고, 선하고, 진실한 사람으로

키우시느라 얼마나 오랜 세월 희생 하셨을까요



제가 다 알 수 없겠죠. 알고 싶지만, 다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그래서, 살아가는 동안 제 아내에게만큼은 기쁨의 눈물만 흘리게 해 주고 싶어요 그래서 몸이 좀 무리가 될 만큼 저도 부단히 노력했던 것 같아요. 사랑은 지나침이 없으니 후회는 없어요. 



장모님의 그 비행기표 선물이 제 평생에 날개를 달아주었어요 저는 그 일의 연장선상으로 미국에서 교환학기 연장을 두 학교를 설득해서 이뤄냈고

그 덕에 15명에 이르는 동기들 중에 저 홀로 한 학기 연장을 할 수 있는 특권을 얻어 냈어요



그리고 저를 따르던 남자 후배 한 명이 자신도 남고 싶다는 뜻을 내 비춰서

학교 측에 한 사람이 더 있으니, 총 2명이 남을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강하게 푸시할 수 있었어요



혹시 아내를 통해 들으셨을까요?

저는 두 학기 만에 돌아왔지만 그 친구는 그 이후 20년 가까이 미국에 머물며 살고 있답니다.



그 형제와 저는 룸메이트였기도 했고, 함께 미국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그 친구는 가톨릭에서 기독교로 개종까지 하게 되었어요 제대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진짜 예수를 보게 되었던 것 같아요

여전히 그 동생과 가까운 관계로 소식을 주고받으며 지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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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이어의 기적


그 덕에 저는 아프리카로, 캐나다로, 이후에 여러 나라를 갈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하게 되었어요

교환학생으로 있으면서 영어 실력이 일취월장할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거든요

그게 다 장모님 덕분이에요~



미국 생활을 끝내고 돌아와서 저는 킨텍스, 코엑스에서 통역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비를 벌었어요

번역도 하고, 통역도 하면서, 아프리카까지 갈 수 있는 실력을 그렇게 다져 나갔어요

이게 다 장모님 덕분이에요~



벌써 결혼 15년 차가 되었네요. 그동안 저희 기쁨이 큰 손주 사랑해 주신 덕분에

기쁨 이가 화가이신 할머니 덕분에, 그림을 그리는 마음에 눈을 뜬 것 같아요

어쩌면 기쁨 이가 의사가 아닌 화가로, 자신의 인생을 캔버스 위에 담는 아주 멋진 예술가로

인생을 살지 않을까 생각할 때가 자주 있어요

이것 역시 모두 다 장모님 덕분이에요~



저는 그때의 감사함을 잊을 수가 없어서,

무일푼, 취업 준비생에 불과했던 제게 누가 봐도 아름다운 따님을 허락해 주셨다는 그 감사한 사실 하나로,

치열하게 사랑하며, 아내의 마음을 알아주기 위해 온갖 책을 독파하고, 세미나에 참석하고, 수백 편의 강의를 찾아 듣고, 혼자서 성경 공부를 하면서, 여성의 마음을, 아내의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게끔 제 자신을 단련시켰어요

이것마저도 다 장모님 덕분이에요~



장모님 지금 저 펑펑 울고 있어요

장모님이 따님을 너무 예쁘게 키워 주셔서 그 덕을 다 제가 보고 있는데,

지금 잠시 제가 멈춰서 있네요



그러나, 저는 사내대장부입니다.

그 어떤 시련이 와도 저는 오뚝이처럼 일어납니다.

지난 사십몇 년 동안 제 인생은 태풍의 연속이었어요

아직 글로는 10분의 1도 다 못 꺼낸 것 같은 기분이에요

그만큼 많은 경험을 주님이 허락해 주셨어요



"이제는 자네가 원하는 일을 찾아, 마음껏 자네의 꿈을 펼치게나"
"나는 자네를 믿으니, 아무 걱정하지 않고 우리 딸과 손주가 잘 지낼 것을 믿으니 자네는 자네가 원하는 그 일을 찾아 새로운 삶을 다시 시작하게나"



말씀해 주실 때 저 속으로 많이 많이 울었어요

장모님, 저는 장모님을 많이 많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자주 장모님과 둘이서만 식사하는 일이 줄어들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으면 좋은 일들이 샘물 솟듯 넘쳐흐를 것 같아요


사위는 반드시 다시 일어섭니다.


기쁨이의 단짝 핑크기쁨이의 단짝 핑크

Love wins all.



사랑이 그 모든 것을 이기기에, 사랑에 제 삶을 던진 이상,

저는 모든 걸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아내도 행복하다고 매일 이야기하고요.

기쁨 이도 많이 어렵지만, 그 가운데서 꽃보다 예쁘게 잘 자라주고 있어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주세요. 그래야 제가 장모님께 그간 해 드리고 싶었던 효도 해드릴 수 있으니까요.



장모님, 모두 장모님 덕분이에요.

장모님이 낳아주시고, 길러주시고, 제게 보내주신 아내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행복한 아내로, 여성으로, 엄마로, 딸로 살아갈 수 있도록

큰 사위가 최선을 다해 나가겠습니다.



이 편지는 공증인의 직인은 찍히지 않았지만,


이 글을 볼 수 있는 전 세계 사람들의 눈도장이 찍혀 물릴 수 없는 편지가 될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엄숙한 마음으로, 지금 이 순간 장모님께 제가 지난 15년 동안 드리고 싶었던 아주 깊은 속 마음을 고백드립니다. 그러니 건강하고, 행복하게, 저희 기쁨이 자라는 거 다 보시고, 기쁨이 결혼해서 아이 낳을 때까지 오래오래 저희 곁에 계셔 주세요.





사랑하고 사랑합니다.

나의 한 분 뿐인 장모님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긴 편지글을 맺습니다


2025.2.9일


큰사위 아헤브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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