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소중한 이야기들은 언제까지나 '현재형'입니다
글 하나를 발행하고 나면,
반드시 이전 글은 과거로 가기 위해
자기 자리를 내줘야 한다.
마치 뒷걸음질 치듯,
조용히 자기 자리에서 물러서야 한다.
그 짧은 사이 글과 글 가운데는 아주 작은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밀물이 들어옴으로,
썰물이 빠져나가며
만들어 내는 틈이 생긴다.
현재와 과거의 모호한 경계선을 두고,
순식간에 제자리가 바뀌어 버린다.
그곳엔 형언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감정이 서로 만나야만 하는 새 교차로가 들어선다.
그렇게 다시 선택을 받아야만 하는 처연한 운명에 처한다.
필자 생각에 이전 글이 아무리 좋은 양약과 같아도,
한 번 자리를 넘겨주면 좀처럼 대중의 관심 대상이 되긴 어렵다
그래서 한 때 인기를 구가했던 오래된 책들도
몇 년에 한 번 개정 증보판(增補版)을 내어,
대중의 시선을 끌어 모으려는 재시도를 거듭한다.
증보판은 약간의 새로운 자료, 사진,
연구결과를 포함하여 엄밀히 말하면 새 책이라 불릴 수 있다.
그러나 예전에 읽었던 사람들마저 한눈에 그 차이를 알아보기 어려운,
'틈'이란 게 생겨버린다. 이전 것과 지금의 차이는 무엇이지?
한눈에 답이 보이는 그런 책을 발행(혹은 출간) 하기는 어렵다.
사람들은 새것에 호기심을 가지지만,
좀처럼 과거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
책은 서가 한 편에 꽂혀 있는 채로,
오랜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누군가의 관심을 그토록 바라며 하염없이 기다린다.
하지만 그 위에는 수북한 먼지만이 쌓일 뿐이다.
모두가 안다.
먼지가 쌓이면 더더구나 선택받기 어려워진다는 것을.
참으로 외로운 존재가 아니던가?
인생과 비슷하단 생각이 든다.
나이가 들면 서서히 잊혀 버리는 인간이라는 그 존재와 닮아 있다.
신문 칼럼니스트를 통해
오랜만에 리뷰되거나
어떤 저명한 상이라도 뒤늦게 받아야
다시 역주행할 기회를 얻게 된다.
마치 어떤 인간을 향한 관심 패턴과 유사하게
우리의 책 또한 그런 운명에 처한다.
최신 발행된 글에 대한 호기심, 그 궁금증만큼 좋은 것이 어디 있으랴?
그 동력이 사람으로 하여금 글을 읽게 만든다.
책 읽는 사람들은 모두 다음 책에 대한 열망이 있다.
그러나, 과거로 가기 위해 자기 자리를 내준 책 역시 엄연히 관심을 받아야 할 가치가 있다.
비단, 우리의 브런치를 보더라도
과거의 글을 스크롤해서 내려가야 하는 수고가 들어감에도
지나간 글들은 엄연히 다시 관심의 대상이 될 충분한 가치가 있다.
그 글의 무게를 달아보면 금방 알아챌 수 있다.
단지 들여다보지 않았을 뿐이지.
하나가 발행되면, 이 전의 것들은 모두 자신을 비워 내야 한다.
틈이 벌어지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지상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내려가고, 또 내려가다 보면
언젠가부터 혼자 오랜 시간을 버텨내야만 한다.
마치 나이를 먹고, 허리가 굽고, 사랑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곁을 떠나가게 되면
나 역시 오랜 시간 쓸쓸히 홀로 버텨내야만 하는 운명에 처하는 것처럼,
책이나 사람이나 잊히는 건 매한가지다.
오늘을 발행하고 나면, 어제는 말없이 자기 자리를 스스럼없이 내줘야 하는 것처럼.
그러나 우리는 모두 기억해야 한다.
과거로 지나갔다고 해서
그것의 의미가 상쇄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책(인생)은 과거로 흘러 들어갔다고 해서 나쁜 책(인생)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로 흘러 들어간 우리 모두의 이야기는
언제까지나 기억하고, 추억하고, 기려야만 하는
소중한 선물(=현재)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다음은 가장 슬픈 이야기 하나를 꺼내려한다.
우리의 과거에 묻어 놓은 서슬 퍼런 이야기 하나를.
그러나 이 전의 글들도 관심을 받으면 좋겠다.
다음 글을 발행한다고 해서,
이전 글의 쓸모가 없어지는 것이 아닌 것을 기억하면서.
<지나면 다시 읽히지 않는 매월호 잡지와 같은 운명에 놓인 사람들과 책을 언제까지나 사랑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