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착한 어린이 상을 받게 되었다 숫기 없고 자신감 없어 아무도 내 존재를 모를 거라 생각했는데, 누가 추천했는지 전교 착한 어린이가 되어버렸다. 각 반마다 착한 어린이가 있었는지 몰라도, 그 해 우리 반에서는 내가 행운을 거머쥐게 되었다. 착한 어린이라니, 착하다는 기준이 무엇이었을까? 지금도 수상 배경이 자못 궁금하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기억이 따뜻해서 그런지 봄이 무르익은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5월 어린이날 즈음이 아니었을까?
교실 앞에 서서 몸 둘 바 모르던 수줍은 남자아이는 가냘프게 온몸을 떨고 있었다 그 사실을 캐치한 선생님은 이윽고 그 고운 목소리에 내 이름을 담아 다시 한번 호명하셨다 TV는 사랑을 싣고 라는 프로그램이 있기 전이었는데, 나중에 알았지만 그날 선생님은 사랑을 싣고 영원히 내게 오셨던 것이다. 한 번 오시고선 영원히 내 마음에 머물러 계시겠다 약속하셨단 뜻이었다. 졸업한 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사랑은 피보다 진하게 내 가슴 한편에 활활 타오르고 있다
50명 넘는 반 아이들 중에 한 명이었을 나에게,
원 오브 뎀(one of them)이라 해도 무방했을 나에게
선생님은 그 부드러운 음성으로 내 이름 석자를 불러 주셨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히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꽃, 김춘수 시인
그 고운 목소리로 내 목소리를 호명해 주시는 것으로 나를 어두웠던 동굴 밖으로 불러내 주셨던 것이다.
내 인생 첫 번째 마음 외출이었다. 동굴 밖은 따뜻했고, 살랑바람이 일었으며, 온 세상에 희망이 가득했다.
처음에 6학년에 올라왔을 때 그 해가 무색 무취한 특별할 것 전혀 없는 평범한 한 해가 될 줄 알았다. 5학년 때까지 특별한 기억이 없는 걸 보면, 올해도 지난해와 하등 다를 것 없는 한 해가 될 거라고 추측하는 게 당연했다. 다를 게 있었다면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마지막 해라는 사실 정도였다. 이제 중학교에 가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질 거란 막연하고도 실낱같던 옅은 기대만이 있을 뿐이었다
개학 후 첫 수업, 담임 선생님을 처음 뵈었다
동그란 안경태 아래 보름달 같이 환한 미소 발하시던 선생님
그 미소를 감싸 안은 고운 목소리는 또 얼마나 포근했는지 4월의 봄에 핀 하얀 목련 같았다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면모를 지닌 선생님,
그분이 나의 담임 선생님이셨다
첫인상이란 단 몇 초 안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던가?
예쁜 미소, 그 첫인상이 왠지 좋았다
선생님은 예상처럼 모두에게 친절하신 분이었다
엄하실 땐 엄하셨지만 내 기억에 아이들은 선생님을 잘 따랐다.
떠들던 아이들, 장난이 심한 아이들도 선생님이 말씀하시면 곧 주의집중 했다
그러나 나는 한 반 50명 넘는 아이들 중 한 명, 여전히 원 오브 뎀(one of them)이었다
땅딸막한 키와 왜소한 체형, 외모의 느낌과 비슷한 숫기 없고, 조용하고 순종적인 아이였다
어느 누구도 나한테 큰 관심이 없었고, 나조차 내게 특별한 매력을 못 느끼던 때였다
경제적으로 고생하는 엄마를 안쓰러워하는 일찍 철든 장남
6학년 같지 않던 속 깊은 아이
늘 먹고사는 문제로 걱정하던 여린 남자아이였을 뿐이었다
초야에 묻힌 들풀 같아서, 나를 알아채는 사람이 드물었다
선생님께서 어느 날 내게 편지를 건네셨다
제자를 격려하고 싶은 마음에 최고의 사랑을 듬뿍 담아 맛깔나고 진하게 그 사랑을 적어 주셨다
그 선생님이 좋아서, 졸업 후 24년 동안 매년 찾아뵈었다.
스승의 날이면 어느 학교에 계시던지 상관없이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신기했던 순간을 꼽으라면 그 선생님께선 다른 학생들에게도 매우 특별한 존재이셨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더욱 기뻤던 것 같다. 선생님이란 특별함을 함께 공유할 수 있어서 마냥 행복했다
몇 년 전 만났던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어 선생님을 다시 찾아왔다
그때 나는 이미 대학생이었는데, 20대를 지나 30대가 되었을 때까지도 선생님은 여전히 졸업 후 더 인기 많은 선생님이셨다
어느 날 선생님이 그 많은 제자 중에 나를 가장 아끼신다 하셨을 때,
설령 그 말씀이 사실과 다를지라도 나는 그 말씀을 온전히 내 것으로 받아들였다
1993년 6학년 졸업반 아이 중에서 24년을 찾아뵌 아이는 나뿐이라고 하셨다
그 말 자체가 내겐 가장 자랑스러운 훈장 같았다
선생님을 내가 얼마나 존경하는지, 그분께 그 사실 하나로 알려 드릴 수 있었던 선물 된 것 같아 마냥 좋았다
인생에 큰 사건이 있을 때마다 선생님께 의논드렸다
기쁨 이가 재활을 시작하고 난 후 선생님을 뵈었을 때, 선생님은 내 어깨를 토닥여 주셨다
함께 아파해 주셨고, 울어 주셨다
병원비에 보태 쓰라고 흰 봉투에 사랑을 담아 주셨다
돌아가는 길에 많이 울었다
선생님 형편도 뻔하실 텐데.. 제가 어떻게 받아요..
죄송스러운 마음을 감출 길 없었다
손사례를 쳤지만, 선생님은 강권하며 받으라 하셨다
아이 치료에 조금이라도 보태라 하셨다
차마 그 큰 사랑을 거절할 수 없었다
어떤 마음이었는지 지난 20년 넘게 경험하고 또 경험했기 때문에, 스승의 날 아니더라도 가끔씩 찾아 뵐 때면 그렇게 선생님 기다리는 5분이 설레고 떨렸다
제자를 아들처럼 여겨 주시는 그 선생님께 보답할 일은 내가 잘 살아 선생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뿐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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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선생님께서 암투병을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들었다.
그리고 몇 년 후, 다시 그 암이 재발했고, 마지막 때엔 내 카톡 연락에 답이 없으셨다
2018년 9월, 그렇게 사랑했던 선생님은 천국 열차를 타고 내 곁을 떠나셨다
나를 아들처럼 아껴주셨던 어머니 같은 그분이 내 곁을 떠나 당분간 볼 수 없게 되었다
부활하는 그날, 천국에서 뵐 수 있게 되었다
정 선생님과 그렇게 이별을 고해야 했다.
그날 밤 몇 시간을 울었다.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이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2018년 9월 6일 선생님과 고별하는 그날, 울며 적어 놓았던 고별 편지 전문이다
영원한 선생님 나의 선생님
정 선생님을 추모하며
선생님!
선생님께서 제 담임 선생님 이셨을 때 모습이 또렷하게 기억이 납니다
선한 미소와 예쁜 목소리, 아름다운 마음의 소유자이셨던 선생님은
언제나 한결같으셨고 제가 서른일곱이 되는 이 날까지도 제게 교실 밖의 선생님이셨습니다
오늘 선생님을 잃었다는 슬픔과 그리움이 사무칩니다
암으로 투병하셨던 선생님께서 몇 년 만에 다시 병이 전이되었다는 말씀을 두 달 전에 하셨을 때 이토록 헤어짐이 갑작스럽게 올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1993년 6학년 시절, 반에서 가장 왜소한 체격을 가졌던 꼬마 같던 제게 선생님은 늘 따뜻하셨습니다 엄마 같으셨고 큰 누나처럼 잘 돌봐주셨습니다
선생님께서 써주셨던 손 편지를 저는 졸업 후에도 보며 초등학교 시절을 그리워했었고 지금도 그 편지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예쁜 글씨체를 보며 선생님은 마음처럼 글씨까지 예쁘시구나 라는 생각을 어린 그때도 여러 번 했었습니다.
1년간 따스하게 돌봐주셨던 선생님 덕분에 저는 그 후에도 매년 선생님을 찾아뵈는 그 기쁨을 스승의 날마다 누렸습니다
4년마다였을까요
선생님이 계셨던 학교를 새로 옮기셨을 때마다 새 학교 위치를 알아보고 찾아뵙던 그날은 제게 정말 설렘이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같은 하나님을 믿는 선생님과 마음을 나눌 수 있어 무척 큰 힘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을 이제 당분간은 뵐 수 없게 되었다는 슬픔이 제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언제나 함께 해 주셨던 정 선생님
언제나 존경하는 인물을 적을 때면 선생님 존함을 적었었는데..
오랜 투병 생활로 교직마저 내려놓으셨을 때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제 아들이 장애를 갖게 되었을 때 선생님에게 제 마음의 힘듦을 토로했던 기억이 납니다
본인의 일처럼 마음 아파해주셨던 선생님
진심으로 감사했었고 선생님을 스승님으로 모셨던 저는 행운아라고 생각했습니다
열세 살 처음 만나 뵈었던 선생님을 24년 간 꾸준히 뵙고 자주 연락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제 와서 보니 제게 크나큰 행운이었습니다
스물 다섯 군대를 제대하고 그토록 꿈에 그리던 미국에 가기 전 선생님을 찾아뵈었던 기억이 또렷합니다
선생님은 정말 자기 일처럼 좋아해 주셨고 너는 잘 될 거라며 축복해 주셨어요
그때 제가 얼마나 가슴이 뛰고 떨렸는지 아세요!
선생님의 격려가 저를 살게 했습니다
지난 1년 투병 생활 중에도 매일 성경말씀을 제게 보내주셨던 선생님
죽고 사는 건 하나님께 달렸다며 믿음으로 끝까지 사셨던 선생님을 추모합니다
열흘 전 마지막 성경말씀을 보내주시고.. 선생님께서 죽음과 사투를 벌이셨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저는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았습니다
선생님께서 천국 가시는 순간에 곁에서 선생님 두 손을 잡아드렸어야 했는데.. 이 무심했던 제자를 용서해 주십시오
선생님 뵈올 천국을 소망하겠습니다
이 밤 선생님이 그립습니다..
저를 너무나 이뻐해 주셨던 선생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제게 특별한 기억을 많이 남겨주셨던 사랑하는 선생님
선생님과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며 저도 제게 허락된 날까지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선생님 사랑합니다 그리고 정말 많이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선생님 가족 분들과 선생님과 함께 다 못 나눈 교제를 이어가겠습니다
천국에서도
이곳에서 예뻐해 주셨던 아이와 저희 가정을 위해 축복 기도해 주세요
이제 예수님 곁에서 편히 쉬세요 선생님, 선생님을 많이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
기쁨아 아빠는 어렸을 때 지금의 너보다 훨씬 더 숫기 없고 부끄러움이 많던 아이였어. 그런 내게 어느 날 천사 같던 선생님이 찾아오셨어. 그리곤 모든 게 바뀌었지. 초등학교 6학년 졸업 이후 24년을 찾아뵈었으니 강산이 두 번도 더 바뀌는 시절 동안 선생님과 교제를 나눈 거야. 아빠는 그때 그 경험을 통해 한 사람을 사귀면 오래오래 마음을 나누는 법을 배웠어. 선생님이 아빠에게 가르쳐 주신 셈이지.
선생님은 언제나 겸손하셨어. 학교 아이들에게도, 가족들에게도 최선을 다해 사랑을 나누셨어. 그래서 너무 빨리 아프셨는지도 몰라. 그 아름답던 선생님을 잃는 건, 이 세상에 손해라 생각했어. 이 땅에 별이 진 거라고 생각했어.
우리 기쁨 이도 벌써 3학년이지. 여러 선생님들을 만나 지금까지 큰 사랑의 빚을 지고 있어 그 사실이 얼마나 소중한 건지 알아야 해
함께 하는 거, 함께 시간을 나눌 수 있다는 거..
아빠는 우리 사회 속에 여러 가지 갈등과 증오의 상황을 보면 마음이 너무 아파. 교사와 학부모, 학생 간의 갈등뿐이겠니. 사회 모든 분야 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미움과 차별을 해결하는 길이 무엇보다 시급해. 아빠는 돌아가신 선생님과의 많은 대화를 통해 그게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결론을 내렸어.
예수님의 사랑을 통해서만 세상은 치유될 수 있다고 믿어. 아빠가 중학교 때 처음으로 그 사랑의 본질을 경험하고 이후에 천착해 들어가면서 얼마나 삶이 평온하고 기쁨이 가득해진지 모른단다. 아빠가 부족한 모습이 여전히 많지만, 여한이 별로 없어.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유산을 남기느라 애썼더니 의와 평강과 희락이 열매처럼 풍성히 맺히고 있거든. 아빠는 우리 기쁨이와 많은 사람들에게 그 사랑을 전해주고 싶어.
기쁨아, 네 주위에 계신 선생님들께 이 자리를 빌려 우리 감사를 표현해 드리자
이 땅에 계신 모든 선생님들께 말씀드리는 거야.
선생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 땅에 마음 아프고 몸이 아픈 아이들 곁에 오래오래 계셔 주세요
선생님들이 계셔서 대한민국은 여전히 희망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정 선생님, 천국 가는 그날까지 선생님께 부끄럽지 않은 제자로 잘 살아가겠습니다.
P.S 사정이 있어 오늘 13화 14화를 동시 발행했습니다 13화 노숙자 편도 읽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