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불장 속에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다시 집을 알아보고자 부동산에 연락을 했다.
부동산은 조건에 맞는 집으로 예약해서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도 감감무소식이라 다시 전화를 했더니 너무 정신이 없어서 깜빡했다며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몇 시간 뒤 전화가 와서는 혹시 오늘 저녁에 올 수 있냐고 했다.
당일에 이렇게 약속을 잡는 것이 부담스러웠지만 그래도 이런 시국에는 집주인 일정에 맞추는 것이 맞는 거 같아 그러고마 했다.
6시 반에 부동산 앞에서 보기로 약속을 정했다.
부동산은 우리 집에서 두 시간 정도 되는 거리라 지하철 시간을 알아보고 있는데 다시 부동산에서 연락이 왔다.
6시까지 오라는 것이다. 조금 짜증 났지만 그래도 아쉬운 쪽이 맞추는 것이 맞으니 그러겠다고 했다.
약속 시간에 맞춰 집에 나설 때 우산을 들고 갈까 말까 고민했다.
왠지 하늘이 꾸리꾸리한 게 꼭 비가 올 거 같았지만 몇 시간 동안 움직여햐 할 텐데 -조금이라도 가볍게 가고 싶었다.
또 일기예보에서도 밤에나 비가 온다고 했기 때문에 우산을 들고 가지 않았다.
하지만 지하철에서 내려 지상으로 나오자 하늘에서는 이미 닭똥 같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도무지 이 비를 다 맞고 걸어가기에는 가야 할 길이 멀었기에 편의점에 들러 우산을 샀다.
검은색, 흰색, 길고 짧은 우산 중에서 딱 보기에도 가장 싸 보이는 우산을 골랐다.
두근두근 계산대에 가져가보니 삐빅 - 결제금액은 9000원.
아니 무슨 비닐우산 하나에 9000원이야!!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우산을 샀다.
부동산은 언덕 꼭대기에 있어 걸어 올라가는 내내 숨이 찼고, 싸구려 우산은 점점 더 무겁게 내 어깨를 짓눌렀다.
집에 쌓여있는 가벼운 우산 하나 챙기는 게 싫어서 그냥 나온, 과거의 나를 원망하며 한 걸음 한걸음 내디뎠다.
드디어 부동산에 도착히니, 6시에 하나를 보고 7시에 하나를 보고 하나는 집주인이 돌아오는 때에 맞춰 봐야 한단다.
집 하나를 보고 나서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하다는 건데 - 좀 난감했지만 뭐 부동산에서도 어쩔 수 없었겠지 싶었다.
한 시간 동안 단지를 둘러보면 되겠다 싶었지만 코딱지 만한 단지를 둘러보는 데는 10분이면 충분했다.
비가 와서 어디 앉을 곳도 마땅치 않아 하릴없이 단지 내를 빙빙 돌았다.
그렇게 한 시간을 기다려 두 번째 집을 보고 드디어 마지막 집을 볼 차례가 되었다.
하지만 부동산에서는 아직 집주인이 도착했다는 연락이 없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집을 보여줄 동안 마지막 집 앞에서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그렇게 기다리기를 10분, 20분, 30분. 오도카니 서서 기다리다가 다리가 아파 쪼그려 앉았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단지 내를 뱅뱅 돌며 산책하는 사람들이 자꾸 내 옆을 지나갔다.
저 사람들은 비가 오는데 집 앞에서 삼십 분째 쪼그려 앉아 있는 나를 보고 뭐라고 생각할까.
문득 서글퍼졌다.
아무리 봐도 6시 반까지 와도 충분했을 거 같은데 부동산은 왜 6시까지 오라고 했을까.
이렇게 나를 기다리게 하고 다른 손님에게 집을 보여주는 게 맞나?
내가 너무 어리숙하고 없어 보여서 부동산에서도 이렇게 막 대하는 걸까.
30분이 넘어 부동산 사장님이 왔다.
집주인이 집에 도착했다고 진즉에 문자를 보냈는데 깜빡 보지 못했다고 한다.
집을 보러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얼굴이 문득 가난해 보였다.
푹 꺼진 볼, 핏기 없는 입술, 푸석한 머리. 나는 이렇게 가난한 얼굴이라 이런 수모를 당하는가. 서글펐다.
집주인은 집에 왔다고 연락한 지가 언젠데 이제야 집을 보러 왔냐고 화가 나 있었고, 나는 눈치가 보여 서둘러 집을 보고는 돌아왔다.
다시 지하철을 두세 번을 갈아타고 두 시간이 걸려 돌아오는 길- 나는 울 거 같은 기분이 되었다.
나는 어쩌다 서울에서 이리도 먼 곳에서 살고 있고, 어쩌다 이리도 가난한 얼굴이 되어 남들에게 이런 대우를 받는가.
지하철역에서 내려 지상으로 나와보니 비는 이미 그쳐 있었다.
무거운 9000원짜리 우산을 지팡이 삼아 걸어가는데 마음이 푹푹 내려앉았다.
한 푼 두 푼 모으며 이렇게 노력을 해도, 남들 식사할 시간에 몇 시간씩 지하철을 타고 가서 집을 봐도 나는 모르겠다.
오늘 본 집 중에서 뭐가 좋은지, 이 돈 주고 이 집을 사는 게 맞는지, 무리를 해서라도 한시라도 빨리 뭐라도 사야 하는지, 기다려야 할지 - 아무것도 모르겠다.
열심히는 하는데 잘하지는 못하는, 이런 아등바등 노력들이 사실은 바보 같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 같았다.
지금 내 인생이 마치 밤낮 죽어라 공부는 하는데 잘하지는 못하는 열등생이 된 거 같아서 힘이 쭉 빠졌다.
속상한 마음에 술을 마시며 넷플렉스를 몇 시간씩 보다 잠에 들었다.
일어나 보니 하늘이 참 말갛게 개어 있다. 공기도 좋고 선선한 날이다.
문득, 한 달 전 누수 소송 때문에 정신과 약을 먹으며 매일매일 소장을 기다리던 모습이 기억이 난다.
지금은 소송 외에도 부동산 투자랄까-그런 걸 고민하고 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얼마나 사치스러운 고민인가.
얼마나 감사한 고민인가.
불과 한 달 만에 고민의 축이 바뀌었다.
그때는 누수 하나로 죽을 거 같았는데 지금은 다른 걸로 눈물을 찔찔 거리고 있다.
산다는 것은, 사람이라는 것은 참 다채롭다.
기존의 고민을 가져가면서 또 새로운 고민을 끌어안고 울고 웃는다.
뭔가 훨씬 기분이 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