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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치 Apr 13. 2018

애칭


그때의 나는 연애경험의 부피를 무척 중요하게 생각했다. 스무살 여름에 만났던 A, 스물한살 잠깐 데이트했던 B, 스물셋 진저리치며 헤어진 C, 그리고 D, E, F.. 각각의 얼굴들을 연애의 훈장처럼 생각했기에, 아무리 짧더라도 만났던 순서를 짚어가며 기억해 두었다.


남자를 많이 만나본 여자가 곧 매력적인 여자라고 생각했다. ‘질보다 양’ 이랄까. 질을 높이기엔 내 능력이 안되니, 양이라도 늘리자. 연애의 횟수를 누군가 물어오면, 적어도 다섯손가락은 넘길 수 있도록. 그렇게 악착같이 기억하려 애썼다.


연애의 횟수가 노련함의 가늠자일 수 없고, 경험의 과시로 얻는 선망이 부질없음을 알고난 후에야 비로소 기억을 위한 노력을 그만두었다. 곧 몇몇은 오래전 사두고 구석에 박아둔 소모품처럼 그 존재조차 희미해졌다. 아쉬움은 없었다. 딱 그만큼이었을 뿐이라고 수긍할 따름이다.


남산의 자물쇠들. 염병. 안 헤어진 사람은 몇이나 되냐.


수년전 마침표를 찍은 연애를 다시 떠올린 것은 블로그를 통해서였다. 십년 가까이 운영해온 내 블로그는 이 구멍많은 연애사를 꽤 착실하게 기록해두었다. 우연히 누른 guest 페이지에 그시절 꽤 진지하게 만났던 사람이 남긴 메모글이 몇 개 남아있었다.


사람은 가고 없는데, 그 흔적은 이렇게 남는구나. 아쉬움이나 그리움같은 미지근한 감정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저, 그와 나누었던 끈끈한 유대와 애착이 생생하게 기억나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2011년. 통영의 강구안


우리는 연애를 통틀어 딱 한번, 영화 ‘하하하’의 배경이 되었던 장소, 통영으로 여행을 갔다. 모텔 객실에 있던 컴퓨터로 통영여행 정보를 검색했는데, 그때 들어갔던 한 블로그에 꽤 지루한 표정의 개 한마리를 찍은 사진이 있었다. 사진의 이름에는 무심하게 세글자만 적혀있었다.


‘멍뭉이.’


그렇게 하자고 정한것도 아닌데, 그때부터 이 ‘멍뭉이’ 는 구분도 없이 서로가 서로를 부르는 애칭이 되었다. ‘ㅇ’이 많아 어감이 부드럽고 귀엽다는게 이유라면 이유였다.


그시절의 애칭이 멍뭉이였다. 직역하면 ‘개’.


통영여행 이후로, ‘멍뭉이’는 우리의 사랑을 키우는데 크게 기여했다. 폭풍같이 싸울때도 호칭은 ‘멍뭉이’를 벗어나지 않아서, 결코 싸움이 깊어지지 않았고, 울며 화해할때도 “멍뭉아ㅠㅠ” 하면서 서로를 안고 토닥였다.


멍뭉이가 워낙 입에 배서, 종종 실수로 직장 동료나 친한친구, 또는 엄마에게 이름대신 ‘아, 멍뭉아!!’ 하고 외치는 일도 있었다. 곤란한 순간도 기꺼이 연애의 한 에피소드로 포함시켰다. 사랑에 흠뻑 젖어있던 때였다.



아마 5년쯤 되었겠지, 어림짐작 했던 것이 어느새 훌쩍 지나 7년 전 일이 되었구나, 그대와의 연애가. 저 메모들을 본 이후로 나도 모르게 입에서 ‘멍뭉이’가 튀어나와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내가 혹시 그사람을 그리워하고 있는건 아닌지 자문도 해보고 현재의 내 상태를 곰곰이 뜯어도 보지만, 역시 아니다. 그 사랑은 끝나서 좋은 거름이 되었다.


나는 새로운 사람에게 그만이 갖고 쓸, 나만의 애정을 담은 이름을 붙일거다. 어떤 과거와도 비견되지 않고, 새로운 날들에 유일한 묘사가 되어줄 하나의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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