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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치 Mar 06. 2022

우리, 이혼할 수 있을까 #7

내 행복에 네가 더이상 필요하지 않아



 집을 구해 나오고도 한참 후, 한달간의 조정기간마저 다 지나 완전히 이혼을 마무리 하고 나서 친구들을 불러 조촐한 집들이를 연 적이 있었다.


 네명의 동갑내기 기혼녀들이 모인 이 집들이에서 그간의 이야기를 조금 풀 수 있었다. 친구들은 잠자코 들어주었고, 그 뒤로 예상했던 질문이 이어졌다.



"근데, 너 왜 서울 안가?

여기 연고도 없는데 굳이 남아야할 이유가 있어?"




 내 이혼소식을 전해들은 이들이 약속이나 한듯이 똑같이 물었던 것이 바로 이, 거취문제였다.


언니, 그럼 서울 가는거예요?

누나 그럼 이제 우리 못보겠네.

이제 엄마랑 사는거야?


등등 다양한 구색으로 이곳을 언제 어떻게 떠날지 물었던 친구들에게 했던 대답을 오늘 여기에 옮겨본다.


 이것은 집을 구한 이후의 이야기에 앞서, 이곳에 둥지를 틀 결심을 한 내 선택에 관한 이야기이며, 동시에 내 삶의 주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내 예상이 맞다면 독자들도 의아했을텐데, 오늘 이 글이 속시원한 답이 되리라 믿는다. 그러니까 오늘의 글감은 요컨대, 왜 굳이 저 깡촌에서 저러고 버티고 있는지, 혹시 재결합을 의중에 두고 있는건 아닌지에 대한 대답이 되겠다.





 나는 이혼을 결정한 순간부터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까지 단 한번도 이곳을 떠날 생각을 품어본 일이 없었다. 그말은 다시말해, 결혼을 제외한 생활의 모든 부분이 충분히 만족스럽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도 서울 생활 길게 하다가 그렇게 멀리 가면 적응하는 게 쉽지 않을텐데.'



하고 속으로 생각들 했겠지? 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당차게 시골가서 살겠다고 선언했던 2018년, 무모했던 그 때로 거슬러가야 할 것 같다.


 그때의 나는 X, 당신만 있다면 내겐 시골도 심심하지 않다면서, 모두의 만류를 무위로 돌렸었다. 익숙한 환경에서의 이탈이 새로운 국면의 삶과 마주하는 일인줄은 알았으나, 그것이 이렇게나 큰 정신적/신체적 스트레스를 동반할 줄은 몰랐다.





 이곳에 내 자리를 만들었던 2018년 10월부터 약 2년간을 결코 '살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집에만 콕 박혀서 오로지 X와 강아지에게만 의지했던 기간이었다.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것이 단순히 의식주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에 다들 동의할 것이다. 삶에는 일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문화생활을 하고, 자기계발을 하는 등의 사회활동이 필수적이다.


 다시말해, 여기서의 나는 어떤 사회활동도 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X와 강아지, 고양이, 마지막으로 필사적으로 피하고싶은 시부모님이 내 좁은 사회의 전부였다. 외롭고 심심했지만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건지 알 수 없었다.





 20년도 3월부터 일을 시작했다. 행정복지센터 사무보조일이었다. 내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강한 열망으로 오피스룩까지 갖춰입고 출근했었다. 그때의 그 첫 발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음에 동의하지만 사실상 그 일은 정말 지루했다.


 가끔 오는 민원인들에게 믹스커피를 내주고, 우편물을 정리해 넣는 일 만으로 한달 170만원 남짓한 월급을 받았다. 외로움도 전혀 해소되지 않았다. 공무원들은 이 지역 출신도 아닌 계약직 사원과 사담을 나누려하지 않았다. 어쩌면, 과하게 일 욕심을 내는 이 낯선 여자가 부담스러웠거나.

 그렇게 다섯 달만에 그곳을 나왔다. 일을 하고 싶었다. 일로써 내 삶의 의미를 되찾고 싶었다.





 두번째로 갖게된 직장은 그런 의미에서 아주 만족스러웠다. 3명이 일하는 작은 사무실인데 일은 엄청 많아서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를만큼 바빴다.


 그래도 아직 부족했다. 나는 섞여들 무리가 필요했다. 그 안에서 주목받고 싶고, 사람들과 함께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꼭 서울에서 하던 모양으로 다양한 콘텐츠로 함께 놀 크루를 만들었다. 많은 이들이 모였다.


 한 해 동안 활동하면서 꾸준히 사람이 들어왔다. 이제 우리 크루는 이 지역사람들에게 뭐하는 애들인진 몰라도 들어본 적은 있는 꽤 큰 단체가 되었다. 나는 이제 전문성을 띄는 일을 하고, 주기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있으며 영향력있는 사람이 되었다. 신이 났다.




내새끼. 보리.


 하루의 시간을 오롯이 내가 하고 싶은 일, 그로써 나를 성장시키는 일들로 채워본 사람은 그 경험이 얼마나 큰 성취감을 불러일으키는지 알것이다. 그런 하루들이 쌓여 일주일, 한달, 몇 개월이 지나는 동안 나는 점차 X를 찾지 않게 되었다.


 내가 맛있게 밥을 먹고 깊이 사색하고 동네를 산책하며 취미를 즐길때에 내 곁을 지킨 것은 오직 강아지 보리 뿐이었지만, 그 사실이 이전과 달리 두렵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오히려 나는 이곳에 온 이후 그 어떤 순간보다 행복하다고 느꼈다.


 그건 정말 얄궂은 일이었다. X는 줄곧 내게 '너의 행복을 나에게서 찾지 말라'며, '네가 나 없이 행복하길 바란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되고나자, 이제 더이상 X가 필요하지 않게되었다.





 그러니 내 이혼은 성격차, 불화같은 이유로 말미암은 사달이 아니다. 행복을 실천한 결과다.

 나는 내 일을 사랑한다. 내가 만들고 키운 크루도 소중하다. 그를 통해 연을 맺은 친구들도 더없이 귀하다. 나를 인정해주고, 내 능력을 필요로하고, 나를 주목해주는 사람들이 있는 이 작은 사회에 진심으로 감사하다.


 그러니 나는 내 행복을 길러낸 이 자리를 떠날 생각이 없다. 지금의 삶을 너무나 사랑하고 충분히 행복하다. 이혼하길 정말 잘했다. 이곳에서 결혼하고 이혼한 내가 정말 자랑스럽다. 그러니까 서울 왜 안가냐고 묻지마. 나 여기 뼈를 묻고 살거야. 히히.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이킷은 용치에게 쓸 힘을 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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