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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치 Mar 10. 2022

우리, 이혼할 수 있을까 #8

내 뇌는 합리적이고 싶었지만



"엄마, 이 집은 어때?

회사까지 걸어서 30분이면 운동도 되고.

여름에는 좀 덥겠지만 그정도면

평소에도 다니는 거리니까.."



 엘리베이터 없는 5층의 월세원룸을 보고 나오면서 엄마에게 의견을 물었다. 계단 오르내리는거야, 오래전에 살아본 적이 있으니 크게 상관이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이 집, 신축은 아니지만 관리가 잘 되어서 이정도면 내 청결기준에도 아슬아슬하지만 합격점이다. 내부도 넓어서 옷장이며 침대가 들어오고도 너끈하다. 부엌은 아주 구식이지만 요리를 안 해먹으니 문제없을 것 같고, 세탁기랑 냉장고는 사야하고..



"그러지말고 차분하게 봐. 쫓길 필요없어.

적합한 집이 없으면 안 나가면 그만이야.

너희 아직 끝난거 아니야."




 내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있던 엄마가 나직하게 한마디 한다.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 급했구나. 이러면 안되는 건데.


 맞다. X와 나는 아직 서류상 부부이고 어떤 절차도 진행하지 않았다. 따라서 여전히 그 집에 살 권리가 있다. 마뜩찮은 집으로 옮겨가면서까지 빨리 나와줄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건 나를 위한 선택이 아니다.


 그제야 이 집이 다시 보인다. 출근에 30분이 걸리는데 바쁜 아침에 보리가 일을 치면 지각 확률도 높아진다. 해가 잘 들지 않으니, 빨래 말리기도 힘들것이고. 싱크대는 좁아도 너무 좁아서 당장 빵 잘라먹기도 불편하다. 사소한 작은 불편들이 모이면 전체 생활의 질이 떨어진다. 이 집은 나에게 맞지 않는다.

 이래서 엄마가 있어야 좋구나. 하마터면 마음이 급해서 일을 그르칠 뻔 했다.





 뭔가를 결정할 때는 그에 따르는 득과 실을 냉정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순간의 감정으로 덜컥 정해버리고 나면 뒤늦게 후회하게 된다. 당시에 집을 알아보는 일이 그랬다. 그러면 안되는 줄을 알면서도 '이정도면 괜찮지' 하면서 타협하고 싶은 충동에 자꾸 흔들렸다.


 뭐 사실 누구라도 그럴수 밖에 없지 않나. 상상 이상의 허접한 집-알루미늄 샷시-을 보고 충격받은 마음과 어서 빨리 집을 구해야한다는 압박감이 내는 시너지는 대단했다. 여기에 X가 눈치까지 주니, 나는 마치 대출이자가 밀린 빚쟁이처럼 조바심이 났다.


 그러던 어느 오후, 출근해 일하고 있던 내게 X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홈페이지에 괜찮은 매물이 올라왔으니, 퇴근길에 한번 가보면 어떻겠느냐는 거였다. 만사를 제쳐놓고 후다닥 게시글을 확인했다. 과연, 회사에서 10분거리에 신축, 월세 금액이 좀 부담스럽지만 가볼만한 곳이었다. 부리나케 집주인에게 연락해 퇴근 후로 약속을 잡았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일하고 있는 사이에 이 집을 새치기 당할까봐 계속 불안했던 것 같다. 각종 연줄이 합리적 체계에 우선하는 곳이다.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하물며 부동산도 안 끼고 계약하는데.


 안절부절 못하며 다리를 떨고 있다가 여섯시가 되자마자 사무실 문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좀 늦어진다는 집주인에게 도어락 비밀번호를 받아 문을 열었는데, holy, 그 순간 알았다. 내 살곳은 여기라는 걸.


 일단 창이 커서 집이 아주 밝았다. 여기에 세탁기, 건조기, 냉장고, 전자레인지, 천정형 빌트인 에어컨과 아일랜드 식탁, 화장대, 옷장까지 있다. 싱글라이프의 품위를 유지하고 삶의 그늘로부터 나를 보호해줄 이 집에 나는 홀딱 반해버렸다.


 고장난 곳이나 오염은 없는지, 수압은 괜찮은지를 건성으로 살펴보는동안 마음이 자꾸 둥실둥실 떠올랐다. 계약도 안했는데 이미 이 집에서 시작할 삶에대한 기대감에 자꾸 신이 났다.






 이윽고 집주인이 도착했다. 월세며 보증금, 관리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다시 현실로 내려섰다. 마음이 복잡해진다. 50만원. 다달이 나가기엔 무척 큰 돈이다. 이런저런 수입들을 생각하면 못낼 돈도 아니지만, 그걸 저축하면 또 금방 큰돈이 될 텐데. 역시, 조금 고민은 해볼까. 계약을 하더라도 내일 할까.


 아일랜드 식탁을 사이에 두고 집주인과 마주 서서 골몰한다. 집주인에게서는 여유가 묻어난다. 할거면 하고, 말려면 말아라. 너 말고 다른 사람 없겠냐. 그런 태도가 못내 아쉽다. 휘둘리지 말자. 휘둘리면 안돼. 무채색으로 모던하게 마감한 인테리어를 다시 쓱 훑어본다. 살고 싶다. 비싸다. 살고싶어. 너무 비싸. 안돼, 냉정해야 하는데.

 그때 웬 아저씨가 성큼성큼 들어왔다.



"아이고, 내가 여기 언제 자리나나 몇달을 기다렸는데. 아가씨 계약 할거예요?"




 인간의 판단은 상황에 크게 좌우된다 했던가. 아무리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써봐야 소용없다. 이것이 불합리하며 이성적이지 못한 판단임을 알면서도 불안감을 자극하는 상황에 놓이면 높은 확률로 거기에 승복하고만다. 그토록 냉철하고자 했던 여자, 용치는 이렇게 타의(?)에 의해 선택을 질러버렸다.



"네. 할건데요.

사장님, 저 계좌번호주세요."





시골살이 4년 차, 연고하나 없는 곳에 비로소 내 공간이 생겼다.







+최근 다시 일이 많아져서 조금 늦어지네요. 그래도 매번 찾아와주시는 분들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봄이 와서 신납니다. 다들 설레는 하루 되시길.

+라이킷은 용치에게 큰 힘이 됩니다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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