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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치 Mar 22. 2022

우리, 이혼할 수 있을까 #9

법원가던 날의 초상(1/2)



 3월도 어느새 다 갔다. 작년 8월에 갈라섰으니 이제 7개월차에 접어든 셈이다. 이따금씩 누가 이제 좀 적응했냐고 묻는데 솔직히 그런걸 생각할 겨를이 없다. 벌여놓은 일이 너무 많아서 매일 정신없이 보내고 나면 잠들기 바쁘고. 그럼에도, 솔직히는 괜찮지 않다.


 같은 지역에 살고있으니 영영 안보기는 애초에 힘든 일이고, 가급적 피하려고 신경쓰며 지낸다. 우리 사이에 엮인 사람과 일, 장소들에 가게되면 혹시나 그의 차가 있진 않은지를 살핀다.


 당차게 살고있지만 나 사실은 이렇다고 주위에 속을 풀었더니, 이제는 그들이 알아서 'X가가 몇시쯤 올 것 같다' 하면서 마주칠 상황을 막아준다. 내가 그 자리를 피하는 모양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만나서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은 그 기분이 더 싫다. 나는 아직 그를 편하게 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게 흐른다. 특히나 우리 가족들은 내 이혼 이슈에 관한한 제각기 타임머신이라도 탄것마냥 제각기 다른 타임라인을 살고있는데, 그나마 내가 제일 정상 속도에 맞는 편이고 우리 엄만 아직 내가 이혼하던 당시에 머물러있는 듯 하다. 오빤 아예 내가 결혼도 안 한 17년도 쯤에 정지해있는 것 같다.


 사람의 의식이 그런가보다. 그게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머리에 깊이 각인된 순간에 매달려 정박하듯 닻을 내리고 버틴다. 그냥 좀 흘려보내지. 정작 당사자는 잘 하고 있는데.


 엄마는 여전히 당뇨 위험에 끼니 챙기느라 고생하면서도 무려 서른중반이나 먹은 딸이 열다섯 중학생 같다면서 걱정하고 신경쓴다. 다그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니 어쩔 수 없다. 원래 인간사 대부분의 일들은 시간이 해결해주니, 이것조차도 시간에 맡겨볼 밖에.





 어느 아침, X가 법원 출석일을 알려왔다. 8월 13일 금요일. 6일에 집을 구했으니 딱 일주일 후인 셈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9시 도착을 목표로 일정을 꾸렸다. 전일휴가 대신에 오전 반차를 냈다. 일정을 마치고 나면 오후에는 출근을 한다. 최대한 평소같은 하루를 보낼 생각이었다.


 저녁엔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다. 집을 구했고, 이사날짜도 잡았고, 법원에 잘 다녀왔으며, 나는 괜찮다고 내 근황을 전해줘야지. 맛있는 걸 먹고 즐겁게 떠들어야지. 그냥, 전화로도 문자로도 손쉽게 할 수 있는 그 말을 왠지 오늘은 누군가의 얼굴을 보며 하고싶었다. 누구든 만나야 할 것 같았다.




 회사에 이혼 사실을 말할지 말지는 조금 고민했었다. 그간의 해온 꼬라지를 생각하면 보나마나 신나서 입방아 찧고 다닐게 뻔한데, 비밀로 할까 싶다가도 오히려 그렇게 해주면 만나는 사람마다 내 입으로 말해야 하는 수고를 더는 편의도 있다. 비밀로 해봐야 그게 얼마나 갈 건가. 애당초, 이게 비밀일 필요는 있고? 뭐때문에?


 내가 지인들에게 이혼이야기를 선뜻 꺼내지 않은건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그래도 좀 더 참지' 하면서 그들 마음대로 내 선택이 옳다 그르다 판단하는게 싫어서였고, 둘째는 이혼한다고 했을 때 당황하는 표정들을 보기 싫어서였다.


 못 들을 말 들은것처럼 굳어지는 얼굴도, 위로하는 말이나 동정도 싫다. 에라 모르겠다, 오전 반차와 함께 이혼 사실을 전했다. 상사는 한숨을 쉬며 그래도 좀 더 참지그랬냐고 말했다.





 출석일 당일, 일찍 일어나서 공들여 나를 꾸며주었다. 과거 영업부에서 일할때 즐겨 입었던 오피스룩을 꺼내 다려입고, 신발장 가장 높은 칸에 모셔둔 하이힐을 내렸다. 웨딩드레스를 입던 날의 내가 생애 가장 아름답길 원했듯이, 법원에서 혼자 버텨야하는 나도 잘 가꿔주고 싶었다.


 X와 함께 집을 나서는게 참 오랜만이다. 8월의 하늘은 싱그럽게 맑고, 구름은 영화처럼 아름다웠다. 떨어지는게 아쉬운 강아지는 유리창 건너편에서 깡깡 짖어대고, 길고양이 몇마리는 주차장에 누워 아침햇살에 일광욕을 즐긴다.


 모든 것이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 달라진 건 행선지 뿐이다. 두어번 심호흡을 하고 운전대를 잡는다. 이미 X는 골목길을 빠져나가고 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나란히 운전해본게 대체 얼마만인가.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휴대폰 내비게이션에 진주지법의 위치를 찍는동안 X의 차는 어느새 멀어져 이제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고, 법원에 도착할때까지 단 한번도 내 시야에 나타나지 않았다.




 





+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 꽃샘추위가 유난스럽네요. 목련이 예쁘게 피었던데.

+ 라이킷은 요즘 일이 허벌나게 많아 바쁜 용치에게 쓸 책임감을 줍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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