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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치 Mar 26. 2022

우리, 이혼할 수 있을까 #10

법원가던 날의 초상(2/2)



 태곳적부터 인간의 홍복을 비는 주술적 행사들은 고유한 법도와 절차를 갖춘 예식의 형태로 행해져왔다. 그리고 예식이란 무릇, 염원하는 바가 크고 엄중할수록 장중하고 성대하게 치러지기 마련이다. 좋은 날을 잡고 제단을 세우고, 최상의 제물을 찾는 등의 준비를 통해서.


 예를들어 그런것들 있잖아. 신사를 키워낸 어떤 민족은 일찍이 불가사의에 가까운 거석유적을 세웠고, 조금 오른쪽으로 가서 지중해 밑의 어떤 나라에서는 피라미드 수백기를 올렸다. 그것들의 기타 다른 목적과 용도는 일단 차치하고라도, 거기에 들인 자원과 노력은 인간이 그만큼 커다란 축복을 소망했다는 반증이 아닐까.




 

 이제 현대의 한반도로 돌아오자. 과거, 웅녀로 추앙받았던 곰은 비록 은밀한 성생활까지 추적관리받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예식에 담기는 인간의 염원만은 아직도 상당부분 그 입지를 유지하고 있다. 대표적인게 결혼이지. 그 단 하루, 20분 남짓한 결혼예식을 위해 그 옛날처럼 길일을 잡고 돈과 에너지를 쏟아붓는다는 점에서.


 평균적인 결혼식을 떠올려보자. 식을 올릴 장소로는 하객들을 모실 넓고 우아한 홀을 준비하고 아름다운 조명과 음악으로 식장의 분위기를 더한다. 삼중창정도는 옵션으로 깔아주자. 여기에 귀하게 모신 선생님이 주례를 봐주시고, 박수갈채와 핀조명을 받으며 등장한 두 사람이 일생 서로에게 충실할 것을 서약한다.


 비단 결혼만이 아니라 장례나 졸업, 입학, 임관도 마찬가지다. 오늘 이 의식에 참석한 모든 이들에게 축복을 기원해 달라는 의미야 어디에 대든 일맥상통하는거니까.




  한편, 결혼이 그렇게 많은 축복을 요해 신경써 예를 다하는 일이라면, 어째서 이혼은 그 반의 반절도 존중받지 못하는걸까. 이혼과 결혼은 맺은걸(結, 맺을 결) 떼놓는 걸로(離, 떨어질 이) '혼' 앞에 글자 하나 달라졌을 뿐인데 그 대우가 천양지차다.


 내 생각엔, 심사숙고하여 결혼했지만  심사숙고한 결과, 이혼하기로 한 결정에도 마땅히 적합한 예식이 필요한 것 같다. 그게 복잡한 서류준비와 신고절차가 아니라, 앞으로 너 없이 겁나 잘살아보겠다는 독기를 품은 사람에게 일종의 기를 북돋아주는 의미로다가.(원기옥이라도 모아주라고)





 그런 의미에서 가정법원은 무척 실망스러웠다. 거긴 그냥 사무실이었다. 결혼의 약속을 파훼하는 죄책감이나 침울함같은게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그 무감한 풍경에 나는 좀 뜨악스러워졌다. 새벽부터 신경써 차려입은 노력이 무색하다. 운동화에 적당히 슬랙스나 처 입었어야 했나, 뒤늦게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은 무슨무슨 '법원'이라고 하면 그것들이 제각기 한 개의 청사 건물을 따로 쓰는줄 알았는데, (법''이잖아. 이 있어야지, 독채!) 그게 아니고 은행에 가면 대출창구, 예적금창구 구분되어 있듯 가정법원도 법원의 한 과에 불과함을 그렇게 알게 되었다. 다시말해, 법원이라는 건물의 방 한개에 가정법원이 들어앉아있는 셈이다.


 그러니 가정법원만의 건물이 따로있길 바라는건 고사하고, 그나마 은행같은 오픈형 데스크가 아닌것에 다행스러워 해야하는지도 모른다. 하마터면 경매나 등기보러 온 사람 옆에서 쫙 빼입고 이혼신청 할 뻔했다. 




 

 이혼신청 절차는 아무리 길게 봐야 5분이 안 걸렸다. 그 짧은 시간에는 도무지 경건한 마음, 진중한 태도 같은걸 차릴래야 차릴 재간이 없었다. 여기가 우체국인지 법원인지, 내가 돈을 찾으러 온건지 이혼을 하러온건지 자문하게 하는 것들 투성이였다.


 접수 데스크에서 우리를 맞은 중년의 여직원은 그 법원 같지 않은 모든 것들 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이었다. 이혼신청하러 오셨냐고 묻는 말이 마치 택배 보내러 왔냐고 묻는 투였다. 나에게 이렇게나 큰 이혼이 저 사람한테는 매일 하는 일일 뿐이구나. 누군가의 삶이 방향을 잃고 휘청이는 순간을, 저사람은 저렇게도 아무렇지 않게 임하고있구나.





 당황스러움을 태연한 얼굴로 감추고 신청서에 도장을 찍었다. X도 별 감흥이 없어보였다. 너는 이 모든 상황이 괜찮은건지, 아무렇지 않은건지. 나는 약간 두렵고 조금은 화도 나는 것 같은데. 이혼이라는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들에게 법원은 조금 더 격조있는 태도를 보여야 하는거 아니냐고. (원기옥..)


 그러거나말거나 여자는 신청서를 받아들면서 데스크 위에 놓인 것을 향해 턱짓하고는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거기엔 사무실 복합기 옆에서 굴러다니던  주워다 놓은것 같은 납작한 종이박스가 있었는데,  안에 확인기일에 관한 유인물이 쌓여있었다.


 박스 측면에 대충 매직으로 휘갈겨 쓴 '한장씩 가져가세요'가 눈에 들어온다. 시키는대로 한장을 집었다. 9월 16일과 30일. 더 논의할 것도 없이, 이혼을 최대한 빨리 끝내자는 합의에 따라 9월 16일에 판사를 만나기로 했다.

 앞으로 한 달, 한번만 더 오면 된다. 그럼 다 끝난다.





 10분도 안되어 모든 신청절차를 마친 우리는 완전 쿨하게 '안녕'을 말하고 각자의 차로 향했다. 운전석에 앉아 5분가량의 소감영상도 찍었다. 내 딴엔 일종의 아카이빙으로 해놓은 거였는데, 지금보니 얼굴이 참 많이 상해있어서 어디 내놓지는 못하겠고.


 지금도 분명히 기억나는 한가지는, 이날 일을 다 마치면 맥도날드에 들러 치즈버거를 먹겠다고 생각했었던 거다. 예상외로 일이 너무 빨리 끝나 맥모닝시간이 한참 남은게 변수였지만.


 그러니까 이때만해도 분명히 아무 조짐이 없었다. 런치까지 시간이 남아서 당근도 했다. 박스도 안 뜯은 새 TV를 사서 뒷좌석에 싣고, 맥도날드 사천DT점에 들러서 미국여자처럼 치즈버거를 씹으며  출근을 했으며 저녁에는 가장 친한 친구들을 만나 만두와 냉면을 먹었다.


 행복한 식사는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지긋지긋한 신경성 알러지가 시작되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이킷과 리액션 댓글은 용치에게 큰 힘이 된답니다! (원기옥..)

+기다려주시는 분들께 항상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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