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용치 Mar 30. 2018

결핍에 대하여.

아빠없는 불쌍한 아이




결핍이란 사실 상대적인 것이다.

내가  한짝이 없더라도, 외팔의 인간들의 도시에 산다면 그건 평범함으로 정의될 것이다.  두쪽이 온전해야 정상으로 구분되는 세상이니 내게 없는  쪽이 결핍이  거지,  팔로 사는건  팔에 비해  불편할 뿐인데.

 아빠의 부재가 얼마만큼의 결핍인지 알려준 것은 이런 세상의 잣대였다. 돌아보면 남들 먹는 이상으로 고기반찬을 먹고 살았고, 맞벌이 가정의 자녀들 만큼 혼자 지냈다. 그러니까  상실감의 원인은 세상이 가르쳐준 것이었다. 남들이 예상하는 편모가정의 고충같은게 딱히 유별난 수준도 아니었는데.


 아빠가 없어서 그렇다고, 내가 애처로워 눈물을 뚝뚝 떨구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주위 어른들의 시선에 익숙해져서 내가 불쌍한가보다 하고 알게되었다.





 지금은 60년대가 아니고, 내가 자란 90년대 역시 가난과 편모슬하의 가정환경을 엮기엔 지나치게 형편이 좋은 시대였다. 그러니까, 아빠가 없다는 사실이 가난과 직결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엄마는 흔히들 말하는 ‘건물주였다. 임대수입과 별개로 우리엄마는 몸을 쓰는 일을 혹독하게 했는데,  덕분에 우리 남매는 방치되어 굶고사는 불쌍한 아이들이라는 편견 속에 자랐다. 학년이 바뀌고 새로운 선생님을 만나 가정사정에 대한 면담을 할때마다,  이름에는 별표가 그려졌다.

기실, 나는 생활보호대상자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이해했다. 자주 유인물을 받았고, 그걸 써내면 뭔가가 면제되었다.


  오해 덕분에 받는 금전적 혜택들에 엄마는  집착했다. 좋은 건줄은 알아서 때마다 학교에서 써오라는 서류를 준비해가곤 했지만, 혜택을 받기엔 재산이 터무니없이 많았다.  조건을 맞추려고 서류를 허위로 작성하는 등의 노고는 오롯이  차지가 되었다. 어쨌거나 나는, 대외적으로 불쌍한 아이였다.

내가 용돈이 궁하거나, 빈집을 홀로 지키고 간장밥에 맛을 들이는 등의 모든 행동은 의도와 상관없이 모두 아빠가 없어서인 것으로 귀결되었다.





 대학입학 , 전세자취집에 살고 학자금 대출빚이 없는 것이 굉장한 일이라는  깨닫기까지 나는 아빠없는 아이의 굴레를 벗지못했다. 그건 주홍글자이며, 트라우마였다.

 지금도 아빠가 안계신다는  대답에 실례를 했다면서 미안해하는 이들이 많다. 그래서 나는 “혹시..?” 하면서 묻는  질문들이 싫다.  대답에 곤란해질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당신들인데  어줍잖게 그런 질문을 하느냐고 되묻고싶다.  아버지의 유무가 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거냐고.


솔까말,

너네 엄마는 아빠있어? 너네 할아버지는 아빠있냐구.

아빠가 없다는 내 대답에 “그래? 난 할아버지 없는데.” 하는 대답은 대체 언제쯤 들을 수 있을까.


벗어나고싶다.
나를 정의할 여러가지 수식중에 ‘아빠가 없는’은 이제 좀 그만 꺼내줬으면.






매거진의 이전글 질투, 속 좁은 나의 솔직한 감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