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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Aug 05. 2024

만만한 올케가 가장 만만했던 일

그래서 내가 할 일은 뭔데?


이것저것 다 갖다 붙여서 합류하기로 했으니 이제 짐을 나누어질 차례였다. 가족여행이라. 걱정이 되는 부분도 없진 않았다. 전례 없는 해외여행을 준비하며 나니와 연락할 일이 잦아졌다. 우선 남편은 10년 여권이 만료되었고, 우리 아이들은 출국이 처음이라 여권을 새로 만들어야 했다. 여덟 명의 비행기 티켓 발권부터 나니가 담당하기로 했다. 나도 여권을 다시 발급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영어이름에서 없어도 되는 거추장스러운 묵음 철자를 하나 빼고 나니에게 알려주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내 여권의 만료기간은 아직 남아있었다. 나는 신혼여행을 기점으로 여권을 새로 만들었기 때문에 아직 만료되지 않았던 것이다. 항공권에 입력한 이름과 여권에 기재된 이름이 다를 수는 없었다. 나니에게 부랴부랴 연락을 했지만, 항공권은 공식 홈페이지에서 예매한 것이 아니라서 변경 시 수수료가 세게 나올 것 같다는 답변을 받았다. 아직 만료되지 않은 여권을 두고 재발급받는 것이 비용적 측면에서 더 나을 수도 있었다. 나니는 다음날 아침에 바로 문의해 보겠다고 했지만 나는 괴로운 밤을 보내야 했다. 


못 올 뻔 했던 괌의 시내 풍경


바보 같은 나의 모습을 나니에게 들킨 데다, 짐을 나누어 지기는커녕 시작부터 번거로운 일을 만들었다. 또한 거액을 들이기로 한 결정과는 달리 한 푼이 아쉬운 마음이었던 것이다. 작년부터 고민 끝에 휴직을 결정함과 동시에 올해는 옷부터 신발, 몸에 걸치는 무엇도 구매한 게 없었다. 괌 여행을 앞두고도 휴양지에서 예쁜 사진을 찍기 위한 옷 하나 새로 살 엄두가 나질 않았다. 갖고 있던 옷 중에서 한국에서는 입고 다니기 민망했던 디자인의 옷이나 쨍한 색감의 티셔츠 몇 벌을 챙겼을 뿐이다.


투몬비치가 보이는 두짓비치 리조트. 그냥 지나가기만 했다.


다행히 추가요금 없이 재결제하는 것으로 잘 해결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또다시 입력하고 훑어보는 수고는 나니의 몫이었다.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같이 확인해 달라고 화면을 캡처해서 보내주었지만, 언제나처럼 우리는 컨펌하는 고객의 역할을 할 뿐이었다. 이 상황에서 나는 나의 할 일에 대해 생각했다. 나니가 다른 가족과 조인해서 다녀왔던 작년 필리핀 캠프를 떠올리게 할 순 없었다. 버리지도 못할 짐이 되어 남보다도 못한 가족이 되긴 싫었다.


이파오 비치에서. 아이가 아기를 안고 걷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어쩌면 나도 이렇게 애쓰고 있는 걸까.


물길을 내어주는 엄마백조도 물밑으로는 물갈퀴를 쉬지 않고 움직이는데, 아기백조도 아니면서 뒤따르는 어엿한 어른이 길을 헤매는 꼴을 보여선 안되었다. 아무리 나니가 가이드를 자처한들 모든 것을 그녀가 할 수는 없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기 위해선 일정과 일상을 함께 해야 했다. 어떤 이유로든 열외는 없었다. 이번 여행이 서로의 민낯을 보고 실망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면? 그건 정말 생각만 해도 싫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맡게 될 일은 무엇일까. 무엇이 되었든 나는 그 일을 잘 해내고 싶었다. 만만하지 않은 일이라도 만반의 준비를 다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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