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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Aug 28. 2024

이번 여행의 빌런은 누구일까?

나는 아니길 바랐다


공항에서도, 마트에서도, 음식점에서 주문할 때도 거추장스러웠을 전대를 메고 다니던 나니 옆에 나는 함께 서 있었다. 이런저런 상황에 그녀와 나눈 가벼운 말들과 피곤한 눈빛은 그 자체로 위안이 되었다. 우리가 함께 하고 있다는 마음을 느끼게 했다. 이번 여행의 인솔자 역할을 맡은 나니는 종종 한국에 있는 남편을 그리워했다. 나니의 남편 재이는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스타일이다. 말이 많은 편인 어머니와 남편은 재이를, 그리고 그와 비슷한 부류인 나를 가끔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는 나니가 기댈 수 있는 존재였다.



말을 많이 함으로써 행동력의 비율을 스스로 낮추는 나의 남편은 그녀의 남편과 대조적이었다. 그 사이의 공백은 자연스럽게 내가 채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적극적으로 그녀보다 앞서 무엇을 하려 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오랜 시간 무난한 삶을 추구하던 내게 배어있는 습관이었다. 사람과 상황에 따라서는 몹시 못마땅한 태도일 수 있었다. 평소처럼 그저 그녀 뒤를 따라 조용히 거들 뿐이었지만 나니는 그것이 힘이 되었다고 말해주었다. 다행이었다.



양이 있으면 음이 있고, 남편이 있기에 내가 있다. 이번 여행에서 화두는 역시나 남편이었지만, 그로 인해 나는 그의 그림자 뒤에 숨을 수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그녀들과 함께 한 가족이었기에 미덥지 않은 그의 말과 행동은 하나하나 이미 그녀들을 거쳐간 것들이었고, 그녀들의 입을 통해 피드백이 전달된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모습들은 레이더망에 쉽게 포착되어 그녀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그는 사방에 덫이 놓인 그녀들의 먹잇감 신세였다. 나중에는 급기야 나의 긴급 처방이 떨어졌다.


"아무 말도 하지 마."



착한 나의 남편도 이 방면에선 말을 잘 듣지 못한다. 말이 많은 사람에게 말을 하지 말라는 건 죽어있으란 소리다. 답답해 죽으란 소리다. 그러나 말은 많이 하는데 대화의 과정을 상세히 읽지 고 쉽게 결론을 내버리는 남편 앞에서 세 여자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그래도 오빠니까, 남편이니까, 아들이니까 속으로만 날리고 있던 경고장을 남편 스스로 말을 많이 함으로써 연속 두 번, 아니 세 번으로 노란 딱지와 빨간딱지를 나란히 수령하는 격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뒷모습은 결코 쓸쓸하지 않다. 강력한 항의를 하고야 마는 열정적인 축구선수의 모습과 비슷하다. 그는 언제나 할 말이 가득하다. 필드에서 오래 뛰지 못할 뿐이다.


손흥민 선수의 시그니처 포즈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나 또한 완벽한 며느리와 올케가 아니다. 결혼 초반에는 나의 부족함을 더 많이 드러냈다. 기본적인 부부에 대한 개념, 아내로서 남편에 대한 섬김의 자세가 없었다. 너는 너고 나는 나라는 생각이 강했다. 오죽하면 시댁에 며칠 묵으러 가는데 양치도구를 내 것만 챙겨갔겠는가.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창피하다. 물론 남편 것까지 아내가 챙겨야 할 의무는 없다지만, 차라리 내 것도 들고 가지 않았다면 좋았을 걸. 시댁에서 무슨 칭찬을 듣겠다고 화려한 개인플레이를 했던가 말이다.


어쨌든 이렇게 나의 부족함에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었던 결혼 초반과는 달리, 이제는 무언가 달라졌다. 어머님은 내가 본인의 아들에게 잘해주길 바라는 마음을 거두셨다. 아니 마음은 여전히 있겠지만 말씀을 내게서 거두셨다. 그런 말씀을 하실수록 시댁 식구들은 더욱 내 편이 아닌 것 같다는 말을 어머님께 토로한 적이 있었다. 아들을 걱정하는 어머님의 부탁인 줄 알면서도 철없던 나는 입이 삐죽 나오곤 했다. 어머님을 봐서라도 잘해줘야지 하는 마음보다는, 잘해주려야 잘해줄 수가 없는 이유들만 떠오르곤 했다. 어머님은 그런 나의 마음을 이해해 주셨다. 그래서 이제는 남편에게 말씀하신다.


"조이에게 잘해줘라."



그리고 시누이 역시 내게 '오빠랑 사느라 고생이 많다'는 황송한 말을 건넸다. 끼리끼리라는 말처럼 나도 남편만큼이나 부족한 부분이 있으니 서로 보완해 가며 살아야 할 처지인데, 그런 말을 들으니 이제는 사명감마저 생긴다. 그리고 그것이 말뿐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이번 가족여행을 통해 느꼈다. 어쩌면 평생을 남들 앞에서 밉보일까 걱정하며 아들의, 오빠의 허물을 덮어주고 구멍을 메우느라 애썼던 두 여자가 내 앞에서도 애썼던 거구나 싶다. 이제는 내 앞에서도 그 전전긍긍한 속을 여실히 공유해 주니 비로소 나도 그들과 한 배를 탄 것 같다.



그러므로 남편은 빌런이 아니다. 공공의 적도 아니다. 우리가 공통적으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는 욕해도 남이 욕하면 마음 아픈 게 가족이라고 했던가. 이제 우리는 마음껏 남편을 욕하고(?) 사랑한다. 그러니 우리는 가족이다. 서로의 허물을 알고서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 허물을 나의 것처럼 여길 수밖에 없는 가족. 보이는 저 바다 한가운데 서 있다면 우리는 같은 배를 타고 있겠지. 삶의 모든 순간은 아닐지라도, 우리는 그 순간 태평양을 바라보며 괌에 함께 있었다. 가족은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이루어가기도 한다. 우리는 괌에서 가족을 이루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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