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직자와 그녀, 그리고 자녀
어른의 입장에서 본 가난
무급의 삶을 시작하며 가장 먼저 떠올랐던 건 바로 그녀, 나의 어머니다. 그녀는 아주 오랜 기간 무급의 생활을 했다. 무직자였던 아버지와 몸이 약했던 어머니 사이에서, 그들의 자녀였던 나와 언니까지도 무급의 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그것은 명백한 가난이었다.
적어도 지금 나의 남편은 고정 수입이 있고, 나는 돌아갈 직장이 있는 휴직자다. (물론 한 명의 수입은 은행대출로 인해 고스란히 지출되고 있지만) 고용의 안정성 측면에서 내가 휴직자로서 '누리는' 무급 생활과는 감히 비교하지 못할, 무직자 가정의 무서운 무급 생활이 생각났다.
어렸을 때 가난을 겪으며 내가 느꼈던 감정은 초라하고, 부끄럽고, 창피하고, 슬픈 감정이 주를 이루었다. 그런데 어른의 입장에서 보니 가난은 두려운 것이었다. 건사해야 할 자식이 두 명이나 있는 상황에서 무급으로 인한 가난은 무서운 것이었다. 응당 무서워해야만, 그래서 필사적으로 탈출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벌벌 떨던 어머니와는 달리 아버지는 가난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어떤 집은 아버지가 사업하다 망해서 가난해진 경우도 있었는데, 허세가 아닌 이상 가족을 위해서 무엇이라도 해보겠다는 투지를 불태웠을 것이다. 우리는 늘 가난했을 뿐 빚더미에 앉지는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했어야 할까. 글쎄, 글쎄다.
나의 학창 시절, 아버지는 상당 기간 무직이었고 월급이 없었다. 건설업을 하시던 외가 쪽 친척분께서 가끔씩 아버지를 건설현장에 합류시켜 주시면, 아버지가 몇 달 동안 외지생활을 하며 돈을 부쳐주셨다. 직장의 개념이라기보다는 일감의 개념이었다. 공사일정이 마감되고 나면 아버지는 멀끔히 차려입고 구직을 하러 다니셨는데 그 기간이 매번 길었던 것 같다. 그리고 구직을 핑계로 밥 약속을 잡고, 술자리를 전전하는 모습은 어린 내 눈에도 무급의 기간을 탈출해 보려는 간절함이 보이지 않았다.
좋게 말하면 누군가의 소개로, 나쁘게 말하면 백으로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마땅히 거쳐야 할 그 시절의 관문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 관문을 천천히 지나는 동안 불안과 고통은 빠르게 찾아왔다. 살림을 하는 어머니는 늘 어려웠고 불안했고 막막했다. 두 딸을 먹여야 했고, 학교에 보내야 했고, 생활비를 납부해야 했다. 그래서 아버지를 재촉하다 못해 외가 쪽에 번번이 손을 벌렸다. 내가 아팠을 때도, 전세금과 이사비용이 부족했을 때도 그랬다. 그렇게 한두 번 위기를 넘기고 나니 아버지에겐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마인드가 굳어진 것 같았다. 그 뒤로는 운 좋게 경비직을 구해서(경비직의 경쟁률도 상당하다) 생활이 나아지려나 싶었지만, 아버지는 결코 급여의 전부를 어머니께 전달하는 법이 없었다.
어머니는 점점 아버지를 불신하게 되었고, 정부를 신뢰하게 되었다. 정부는 저소득층 가정을 지원해 주었는데, '일정 소득 이하'라는 기준에 충족해야만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부모님이 아무리 노력해도 소득이 그 이상으로 늘어나지 않았던 것인지, 그 기준에 맞춰 살아온 것인지 내가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나의 초중고 학창 시절 내내 차상위계층을 벗어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무직자와 그녀는 가난에 익숙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