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가난한 생활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바자회에서 자연스럽게 헌 옷을 골라 입었고, 엄마가 교회식당에서 봉사한 후 얻어 온 반찬들을 맛있게 먹었고, 누군가 풀다 만 문제집 꾸러미도 싫지 않았다. 그러나 가난을 둘러싼 시선에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가난을 티 내지 않기 위해 용을 썼다. 나이차이가 조금 나는 언니가 일찍 취업한 덕분에 겉모습은 구색을 맞출 수 있었다. 언니의 옷을 같이 입었고, 사이즈가 맞지 않는 신발을 빌려 신었다. 언니는 내가 안쓰러웠던지 내게 종종 옷과 가방과 신발, 심지어 핸드폰까지 사주었다.
언니의 옷을 입고 밖에 나가있는 동안에는 또래 친구들과 비등비등했다. 우리는 다 같이 돈이 없는 학생이었고,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조교 선생님의 추천으로 장학금을 받거나 간간이 용돈벌이가 되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러나 집에 돌아왔을 때 보이는 낡은 흔적들, 오래된 살림살이와 출처 모를 생활용품과 잡동사니 속에서 나는 늘 구질구질한 감정을 느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곳은 나의 공간이 아니었다. 이사 올 때 남겨져있던 옷장부터 책장, 행거, 작은 서랍까지도 폐지를 줍던 어머니가 눈여겨봐뒀다 어디선가 주워온 것들이었다. 내가 꾸린 것 하나 없었다.
어머니가 야금야금 모아놓은 쓰레기 같은 살림을 몰래 갖다 버렸다가는 동네 쓰레기더미를 순찰하는 어머니에게 적발되기 일쑤였다. 그런 날에는 가감 없이 풀어헤친 쓰레기봉투처럼 적나라하면서도 도무지 낯설고 날 선 어머니의 모습을 봐야 했고, 나는 마치 어머니를 내다 버린 불효자식같이 느껴졌다.
그렇게 쓸데없으면서도 내 마음대로 버릴 수도 없는 오래된 짐들이 가득하고, 부엌과 거실과 안방의 구분이 모호했던 그 집에서 내가 마음 편히 누울 곳은 없었다. 나중에서야 티브이 속에서 어머니와 비슷한 사람을 향한 전문가의 진단을 통해, 어머니의 증상이 저장강박증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언니와 함께 쓰던 작은 방에는 구석구석 곰팡이가 피어났다. 그 방에서 차마 가구를 옮길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나는 얼마 되지 않는 내 책과 물건의 배열만 이리저리 바꿔볼 뿐이었다. 방바닥에는 청소기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면적도 없었다. 눈에 보이는 먼지를 훔쳐내도 발바닥에는 늘 먼지가 붙어있었다.
부모님이 겨우 마련한 낡은 전셋집, 더 낡아빠진 살림살이들이 케케묵은 먼지와 함께 뒹굴던 그 속에서 나는 다행히 탈출했다. 그리고 무급의 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집에 머물며 내가 꾸려온 것들을 바라보았다. 사정상 혼수로 들여오지 못하고 살면서 하나씩 마련한 가전들이 보였다. 중고물품도 보였지만 당장의 필요성과 기능, 집안의 인테리어까지 고려하여 심사숙고 끝에 들인 물건이었다. 그저 쓸만해서 주워다 놓은 쓰레기들은 없었다.
다만 이제 사용을 다한 육아용품들, 혼수를 마련하지 못해 시어머님께 물려받아 썼던 살림살이들,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버리지 못했던 물건들이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넉넉지 못한 무급의 기간에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로 꼽은 것은, 모순되게도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내다 버리는 일이었다.
그동안 사느라 바빠 하루하루를 무턱대고 쌓는 동안 내 삶의 터전에도 먼지가 구석구석 고스란히 쌓여있었다. 물건 각각의 효용성에 대한 판단은 고사하고 정리조차도 제대로 하질 못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거부하지 못한 채 내 삶의 자리를 내어준 물건들로 가득했다. 그 때문에 제자리를 찾지 못한 물건들도 수두룩했다. 나는 단박에 결심했다.
이제, 나의 자리를 찾아줄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