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듯 결혼한 건 아니었는데 그곳에서 나오고 보니 그랬다. 쓸모를 찾아줄 것도 아니면서 어느 것 하나 버리지 못해 끌어안고 있던, 어머니의 짐들 중에서 가장 쓸만했던 건 나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어머니의 가장 무거운 짐이기도 했다.
가족 중 유일하게 꿈을 꾸던 아이는 우울증과 무기력증으로 방 안에서 나오질 않고 있었다. 저러다가 탕나는 것 아니야, 진짜 고물이 되면 어쩌지, 하는 어머니의 조바심은 굳게 닫힌 문 너머로도 전해졌다. 어머니의 한숨과 나의 한숨이 섞여 일산화탄소처럼 좁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작은 방을 같이 쓰던 나의 언니는 젊고 예쁠 때 밑천 없이도 알아서 시집을 갔다. 시집가던 언니의 나이가 되니, 나도 알아서 갔으면 하는 눈치였다. 한 때는 유일하게 이 집안의 희망이었던 내게, 이제는 병들어 죽어가는 것 같은 내게 거는 유일한 기대였다.
나는 가난과 우울을 티 내지 않으려 용을 쓰고 다녔던 젊고 예쁜 아가씨였고, 며느리감을 애타게 찾고 있던 어느 집안에서는 나를 오라 하였다. 나는 가지 않으려 했고, 어머니는 나를 등 떠밀었다. 등 떠밀려 남편에게 닿았지만 그것은 나를 살린 동아줄이 되었다.
당시에는 어머니 자신의 짐을 덜기 위해 나를 내다 버린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자식을 시집보내야 부모의 숙제가 끝난다고 여기셨으므로. 그러나 어머니는 직감적으로 아셨던 것 같다. 이것이 나의 동아줄이 될 것이라고. 그곳에 있다가는 정말 내가 탕이 날 것 같아서, 널려진 쓰레기더미 속에서 나를 꺼내 햇빛에 널어두셨던 것이다. 자신의 낡은 빨랫줄에.
쫓긴 것이나 도망친 것이나 나는 주체적인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예나 지금이나 주어진 삶에 순응하는 성향이긴 하지만, 예전의 삶은 도저히 순응할만한 삶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벗어나질 못했다. 적나라한 현실 속에서 배운 건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을 회피하는 능력이었다.
도처에 널려있었지만 내 마음대로 치울 수 없었던 쓰레기들, 발에 채일 정도로 존재감이 생생했지만 버리지 못해 동거하면서도 외면했던 짐짝들. 어느새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막상 현실을 뛰어넘으려니 뛰어넘지 못하고 있었다. 대가리를 모래 속에 파묻은 멍청한 꿩처럼 나는 그 자리에 오래오래 머물러 있었다.
그 무렵 간신히 하늘에서 내려준 동아줄을 잡고 또 다른 현실세계에 도착했다. 결혼과 함께 정착한 서울은 내가 살던 지방소도시와는 차원이 다른 곳이었다. 그곳에는 지옥철을 타고 매일 출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결혼 직전까지 기어서 다니고 있던 연구소에서는 계약이 끝나자 실업급여가 나왔다.
나는 동아줄을 잡고 오르던 힘으로, 사장이 두 명이고 직원이 다섯 명인 회사에 취직했다. 급여가 많지 않음에도 야근이 잦았다. 당장은 나와 남편만 아쉬울 뿐인 신혼이었지만, 곧 생길 아이들까지 아쉽게 해서는 안될 일이었다. 더 나은 근무환경을 위해 공기업으로 이직을 했다. 그렇게 꾸역꾸역 나의 유급 생활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