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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May 17. 2024

소년원 이야기


스무 살 때였다. 교회 언니들이 내게 물어봤다.


"소년원 한 번 가볼래?"


소년원이라니. 한참 방황했던 중학생 시절, 다른 학교의 어떤 아이가 소년원에 들어갔다더라, 전학 온 아이가 소년원에 다녀왔다더라 하는 소문을 듣고선 나는 저렇게까지는 되지 말아야지, 하며 몸을 사렸던 기억이 났다. 미성년자들이 가는 교도소와 같은 곳(청소년 교도소는 따로 있다), 그렇게 무시무시했던 소년원이라는 곳에 일반인이 어떻게 출입할 수 있을까? 두려움과 호기심이 동시에 일었다.


일명 '소년원 팀'은 내가 다니고 있던 교회 출신의 목사님과 각 지역교회의 성도들, 청년들로 이루어진 특수선교 형태의 사역팀이었다. 사적 출입이 아닌 오래전부터 허가받은 팀과 함께 가는 것이니만큼 이런 특별한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한 편으로는 내가 방황했던 시절이 그 아이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속죄의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마치 난 너를 만나기 위해 그 시간을 겪었던 거야, 같은 인과관계를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해서라도 내 인생에서 수치라고 여겼던 그 시간이, 잃어버린 것 같은 그 시간이 누군가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데 보탬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막상 소년원에 들어가서 만났던 아이들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내게 이해와 사랑을 갈구하는 아이들은 없었다. 그들이 내게 기대하는 것은 그저 맛있는 간식과 외부와의 연결점, 그뿐이었다. 능글맞도록 자연스럽게 말을 거는 몇몇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조심스레 인사를 건네고 말을 걸어봐도 이해할 수 없는 눈빛과 행동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눈동자의 움직임조차 누군가의 허락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소년원은 만 10세부터 만 19세까지의 아이까지 머물 수 있는 소년보호시설이라, 당시 스무 살이었던 나보다 더 나이가 많은 아이들도 있었다. 그 아이들 앞에서 나는 새로 온 선생님으로 소개되었다. 아이들은 내 키와 얼굴을 보고 의외로 쉽게 믿는 눈치였다. 내심 서운했지만 만만하게 보이는 것보다야 잘된 일이니 다행이었다.

괜찮아, 자연스러웠어...!


아이들과 라포를 형성하겠답시고 나의 비행 청소년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도 너희와 다를 바 없는 죄인이다, 몸이 갇혀있지 않아도 감옥에 갇힌 것 같은 삶도 있다, 몸은 갇혀있어도 영혼은 자유로울 수 있다, 등등.. 지극히 종교적인 말들을 늘어놓았다. 아이들은 하품을 했고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려 해도 다대 일 그룹 특성상 아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내게 할 수 없었다. 나의 사적인 것을 묻는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나이부터 속여야 했다. 그곳에 출입할 때만큼은 승모근에 힘이 잔뜩 들어갈 만큼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아이들과의 대면에선 언제나 그렇듯 KO 패했다. 나의 방황은 아이들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아이들을 만나고 나면 얼얼했다. 저 아이들이 과연 변할 수 있을까? 나는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그래도, 내게 필요했던 것처럼, 아이들을 믿어주는 한 명의 어른이 필요할 것 같았다. 나는 아직 완전한 어른이 아니었지만, 아이들을 믿어주는 하나의 존재이고 싶었다.


우리는 아이들을 들여보내고 그 자리에서 찬송가 242장, 황무지가 장미꽃같이 라는 찬양을 불렀다. 눈물이 왕왕 났다. 나는 저 아이들을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런데 저 아이들은 사랑이 필요해 보여요. 저에게 사랑을 부어주세요.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며 나는 일곱 해 동안 그곳을 출입했다. 평일에도 면회를 신청하고 가서 일대일로 대화를 나누었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용돈을 털어 햄버거와 치킨과 피자를 사갔다.


덕분에 아이들은 조금씩 마음을 열어주었고, 내밀한 상처와 쑥스러운 진심을 편지로 전해주기도 했다. 나는 아이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했다. 아이들의 기도제목대로 가퇴원 처분이 나길 기도했고, 퇴원 후 일상에 잘 적응하길 기도했다. 다시는 이곳에서 보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그러나 어떤 아이들은 퇴원하고 나서도 전국구 소년원으로 돌며, 그 사이 한두 살을 더 먹고 종국에는 교도소로 넘어간 아이들도 있었다. 소년원 선생님께서 일러주신 통계에 따르면 재범률이 80%나 된다고 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힘이 빠지고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끝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나는 겉으로는 문제없이 학교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 같이 보였지만 내면으로는 끊임없는 무기력과 우울증, 죄로 점철된 일상이 있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보아도 내 힘으로 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일부터가 그랬다.


우리가 하는 일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그러나 아이들은 우리의 물 긷는 모습을 보았다. 콸콸, 때로는 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들었다. 물이 완전히 채워지진 못했어도 잠깐 높아진 수위 덕분에 오래도록 메말라있던 마음 한 켠에까지 잠시 스며들었을 것이다. 새는 바가지처럼 서툴게 물을 긷고 졸졸 흘려보내는 나도 거기 있었다. 나는 칠 년째 되던 해 도망치듯 그곳을 떠나왔지만, 그곳에는 내가 흘렸던 땀과 눈물이 있었다. 나의 사랑은 실패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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