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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May 24. 2024

파리에서

지방 소도시에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던 나는 그 지역을 벗어나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집도 없고 차도 없는 형편에 가족여행은 사치였다. 여행은커녕 절대적인 이동 반경도 매우 좁았다. 기껏해야 명절 때 근교 친인척 집 방문이 다였다. 그렇다고 세상사에 엄청나게 호기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먼 세상을 생각하며 살았다. 어쩌면 내 발로는 절대로 가지 못할 것 같은 그런 세상을.


스스로 환경을 바꿔보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대학을 가면서 독립해야지, 하는 마음도 먹어보질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현실에 순응하려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때까지도 나의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나마 외국문학을 배우면 더 넓은 세계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에 불문학을 선택했다. 정말로 아득한 생각이었다. 그래도 그 막연하고 아득한 것이 선명한 현실보다는 낫게 느껴졌다. 모든 것이 불투명했지만 그래도 적나라한 현실보다는 아름다웠다. 차라리 그랬다.


어는 재미있었다. 수험생활을 하며 지긋지긋했던 영어와는 달리, 아예 새로운 언어는 내게 새로운 꿈을 주었다. 그 시절 내게 어울리는 색깔이었던 회색과 검은색. 늘 무채색이었던 나의 옷스타일도 멋스러운 파리지앵(파리에 사는 사람들) 스타일이라고 했다. 어딘지 음울하고 밤에 빛나는 파리는 내게 어울리는 도시 같았다. 공부를 열심히 했다. 성적 장학금을 받았고, 입학정원의 10%만 받을 수 있다는 교직이수의 기회까지 주어졌다.


그런데 교환학생 선발 시즌이 되자 나는 오히려 주춤, 뒤로 물러났다. 우리 학교와 자매결연된 외국학교에서 수학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어학연수와 함께 사고가 확장되고 시야가 넓어지는 경험이 될 터였다. 무엇보다 외국에서 신분을 1년이나 보장받으며 머물 수 있다는 건 커다란 특혜였다.


그러나 체류비는 개인의 몫이었다. 먼저 다녀온 선배들의 말을 들으니 천만 원 가까이 들었다고 했다. 물론 그 비용에는 귀국 전에 한 유럽여행 비용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럴지라도 내겐 너무나 큰돈이었다. 사실상 우리 가정의 전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집 전세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금액이었다. 


전세계약이 종료되어 이사를 다닐 때마다 언니와 나는 지역신문에서 그 금액에 맞는 집을 찾았다. 여건 안에서 조금 더 나은 집이 있을까 하며 필사적으로 골라냈다. 그렇기에 결코 잊을 수 없는 금액이었다. 그렇게 고만고만한 집들에서 20년을 살아왔다. 그 집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언니와 내가 있었다. 그런데 그 금액과 거의 맞먹는 돈이 고작 1년이라는 시간에, 나라는 한 사람에게 들어간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았다.


학자금을 빚진 마당에 조금 더 용기 내어 내게 '투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4년제 대학이라는 타이틀과 달리 1년의 교환학생 생활은 감행할 용기가 나질 않았다. 어쩌면 용기가 아니라 자신이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스스로에게도 그만한 투자를 받을만한 자격이 없다고 여겼던 것 같다.

투자는 미래를 담보로 하는 것인데, 나의 미래는 투자할만한 것이 아니라고 느껴졌다. 모든 것이 막연하고 아득했다.


"너는 프랑스에 안 가고 싶어?"

열심히 지원을 준비하던 동기들이 물었다.


"교수될 것도 아닌데 뭣하러."

나는 파리지앵처럼 시크하게 대답했다. 못 가는 것이 아니라 안 가는 것처럼 보이고 싶었다. 결국 나는 지원서도 쓰지 않고, 인터뷰도 하지 않았다. 공부도 재미가 없었다. 나는 왜 이런 걸 보고 있지, 교수가 될 것도 아니고 그곳에 갈 것도 아니었다. 모든 것이 쓸데없게 느껴졌다.


그러나 헛헛한 마음은 지울 수가 없었다. 잠 못 들던 어는 날 밤, 좁고 캄캄한 방에 누워 언니에게만 이런 마음을 나누었다. 그냥 푸념이었다. 같은 환경에서 자란 언니는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아는 존재였다.


"여행이라도 다녀와."

얼마 뒤 당시 언니가 다니던 직장에서 생각지 못한 보너스를 받았다고 했다. 언니는 그 돈을 엄마의 생활비에 보태기보다는 내게 쓰길 원했다. 그 시절 언니는 나보다 나의 미래를 믿어주었다. 나보다 더 나를 기대해 주었다.


그렇게 파리에 갔다. 언니가 사준 노란색 캔버스 운동화를 신고 루브르와 오르셰를 다녔다. 로댕박물관과 퐁피두센터에 갔다. 샹젤리제를 걷고 몽마르트르를 올랐다. 노트르담성당과 사크레쾨르성당에 갔다. 베르사유궁전과 모네의 정원에 갔다. 센 강을 보며 미라보다리를 걸었다.


"조이야, 너도 이곳에 올 수 있단다."

그곳에서 나는 울었다. 내 안에서 울리는 음성과 함께 따뜻한 마음이 올라왔다. 꼭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내 안에서 생각난 말이었지만, 나의 미래를 믿지 못하는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일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내가 이곳에 있으리라는 상상을 한 적이 없었다. 전공이 불문학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싶을 정도로, 나는 꿈도 꾸지 않았다. 얼핏 바라기는 했어도 현실 가능성이 없는 꿈을 꾸듯 나는 너무나 막연한 미래에 머물러 있었다. 어쩌면 내 발로는 결코 갈 수 없는 천국같이 그곳을 꿈꾸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하나님은 어디서든 나와 함께 하실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 좋았다. 아무도 초대할 수 없는 쓰레기 같은 나의 집에서도, 어두컴컴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가 웅크려 있는 곳에만 찾아오시는 분이 아니었다. 나를 자신이 계신 곳으로 옮기실 수도 있는 분이었다.


그렇다. 무소부재. 하나님은 어디서나 계실 수 있는 분이었다. 어둠 속에서만 빛나는 분이 아니었다. 밝은 곳에서도 그곳의 풍경을 통해, 사람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실 수 있는 분이었다. 어디서든 나와 함께 하실 수 있고, 어디로든 나를 인도하실 수 있는 나의 목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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