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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Jun 07. 2024

꿈꿀 수 없는 결혼

결혼 전 지구 멸망설


"우리가 결혼하기 전에 지구가 멸망할 것 같아."


<결혼 전 지구 멸망설>, 언니와 내가 예측한 전망이었다. 결혼 못하고 죽으면 죽었지, 지구까지 멸망할 필요는 없는데. 그리고 예수님이 오시면 오셨지, 종말이라는 단어도 있는데 왜 굳이 멸망이라고 명명했을까 싶다. 아마도 우리의 마음을 대변했던 거겠지. 절망에서 비롯된 멸망이었다.


그러나 정말로, 우리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누가 들으면 웃을까 싶지만 우리는 진지했다. 학창 시절을 통틀어 친구 한 명 데리고 올 수 없었던(딱 한 명 있기는 했다. 그 뒤로는 절대 없었다.) 쓰레기집에 사는 우리라니. 결혼은 집안과 집안끼리 하는 거라던데, 결혼할 땐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집에 찾아올 텐데, 그러면 누구라도 도망가고 말 거라고 우리는 입을 모았다. 겨우 초등학생과 중학생의 대화였다. 그래도 이 절망스러운 마음을 나눌 언니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지구가 멸망하기 전,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한 언니는 꽃다운 나이에 시집을 갔다. 먼저 결혼한 언니는 힘들어 보였다. 해간 것 없다고 시댁에서 무시할까 봐 필사의 노력을 했다. 나는 언니처럼 할 자신도, 형부 같은 사람을 만날 자신도 없었다.


나도 어느새 언니가 시집갔던 나이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내가 결혼을 꿈꿀 수 없었던 이유는 명백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꿈꾸는 결혼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은 노후가 준비되지 않았을뿐더러 현재의 생활능력도 밑바닥이며, 모아둔 돈도 하나 없어서 나의 결혼식 비용마저 빚을 내야 하는 그런 상황. 어느 누가 이런 집안의 사위가 되고 싶을까. 그렇다고 나만 보고 결혼하기엔 나는 또 뭐가 얼마나 잘났단 말인가.


그러다가 결정적인 사건을 계기로 나는 '그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것'을 굳이 표현하자면 나의 결혼지수랄까. 미국에 다녀온 뒤, 나는 여행경비를 갚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두고 휴학한 상황이었기에 엄연히 학생 신분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스물네 살 때의 이야기다.


아버지의 사촌동생인 고모는 목사님과 결혼해서 사모님이 되었다고만 들었다. 명절 때마다 만나는 사이는 아니었다. 부모님을 따라 간 결혼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고모부를 보았다. 교회를 개척했다더라, 온 가족을 다 전도했다더라, 어른들끼리 안부 전할 때나 귓등으로 듣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 자녀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될 때까지도 우리는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매년 봉사하는 곳에서 고모부를 만났다. 고모부는 어느 전도사님과 함께 봉사활동에 참여했다. 그분이 고모부라는 건 봉사활동이 끝난 후 고모의 연락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고모는 내가 아르바이트하는 곳으로 찾아왔다. 목사님인 고모부와, 그 전도사님도 함께.


그들은 같은 교회의 동역자였고, 봉사활동이 끝난 후 그들 사이에서 나의 이름이 거론되었던 모양이다. 옆에서 듣던 고모가 알은체하며 나를 자기 조카라고 말했고, 그 전도사님의 거듭된 부탁에 나를 '소개해주러' 방문했던 것이다. 나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나는 고모가 오랜만에 나를 찾아오는 이유가 이런 것일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그저 사모님이 된 고모가, 신앙생활과 더불어 봉사활동을 하는 조카를 믿음 안에서 '격려하기 위해' 방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름대로 목사님과 사모님을 대접한다고 했는데 고모의 방문 목적은 그게 아니었다.

 

당시 나의 시각에서 그 전도사님은 나보다 나이가 적어도 열 살 이상으로 훨씬 많아 보였다. 아니 지금 생각해도 그렇다. 나를 보며 쑥스럽게 웃던 그 얼굴이 선명하기 때문이다. 고모는 그분이 없는 자리에서, 내게는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묻지도 않고 그 분과 한 번 만나볼 것을 권유했다. 고모는 단호한 나의 거절에 당황했다. 한 번만 만나볼 것을 재차 강요했다. 이미 자기들끼리 어떤 약속을 주고받은 것처럼 난감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의 거절은 거절하려던 것이었을까.


비참했다. 그냥 밥 한 번 먹는 것, 한 번 만나보길 권한 것에 대해 너무 예민하게 반응했나 싶다가도 화가 났다. 결혼과 연결될 수 있는 남녀 간의 만남을 쉽게 권할 수 있는 걸까. 또래를 소개해 주었다면 그렇게 비참하지는 않았으리라. 연애로 끝날 수 있는 나이였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필히 결혼을 염두에 두고 만남을 시작해야 할 것 같은 그 전도사님과 나를 매칭한다는 것은 너무나 부자연스러웠다.


상처가 되었다. 나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서 더 그랬다. 나의 가족이기에 더 그랬다. 나의 집안사정을 더 잘 알고 있기에 그랬던 걸까. 대학생, 스물네 살, 아직 결혼적령기가 아닌 나에게 결혼적령기를 훨씬 넘어 보이는 남자를 소개해주려는 고모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좋은 직장에 취직할 자신은 없었어도, 취직을 준비하며 창창한 앞길을 꿈꾸는 조카에게 고모가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너는 결혼이나 해. 이 사람은 나이가 많지만 너희 집은 돈이 없잖아. 순순히 사모가 되어 우리 교회의 일꾼이 되렴.


아. 이게 나의 현실이구나. 결혼은 집안끼리의 만남이라더니 나의 집안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고모는 그것까지 고려했던 걸까? 나는 결혼할 수 있을까? 나는 내가 원하는 배우자를 만날 수 있을까? 그동안 기도해 오던 나의 배우자는 있긴 한 걸까? 끝내 만날 수 없다 나는 이런 제안을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나의 결혼은 결국 이런 모양이려나. 나는 혼자 살 것인가. <결혼 전 지구 멸망설>이 다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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