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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Jun 28. 2024

두 번 만나고 결혼

결혼은 내게 OO이 되었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일명 '고모 오지랖 사건'과 비슷한 상황이 생겼다. 이번에는 고모가 아니라 엄마였다. 고모에게 묵혀두었던 서운함과 서러움, 분노까지 겹쳐져서 나는 최선을 다해 거부했다.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 추구)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자꾸 어른들이 개입하는 것이 싫었다. 친구가 소개해주면 소개팅, 어른이 소개해주면 맞선이 아니던가.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맞선이라니.


게다가 그 남자에 대한 엄마의 구구절절한 브리핑 끝에 따라온 말이 너무 싫었다.


"그냥 몸만 와도 된대. 요새 그런 집이 어디 있다니."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남자의 나이, 직장, 성격, 키, 신앙 무엇 하나 엄마의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냥 '몸만 와도 된다'는 사돈댁의 전언이 나를 그 집안에 시집보내야겠다는 엄마의 결정적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말이 더 싫었다. 몸만 오면 된다니, 진짜로 팔려가는 기분이었다. 내가 심청이도 아니고, 인당수에 몸만 던지면 되는 것인가? 공양미 삼백 석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물론 상대 집안에서는 배려의 의미로 말을 전했을 터였다. 중간에 연결고리가 되어주신 장로님 측에서 나를 워낙 좋게 보고 소개한 덕분에 사람만 보겠다, 집안사정은 상관없다는 의사를 비친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 집안에 대해 속속들이 아는 것은 아니었다. 장로님께서는 우리 집안에 대해 '돈이 없는 집안' 정도로만 전한 것 같았다. 그분도 그 정도까지만 아셨으니까.


엄마는 틈만 나면 나를 설득했는데, 밥을 먹으면서도 그 남자를 '한 번만' 만나보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 남자를 만나면 왠지 결혼해야 할 것 같아서 싫었다. 어른들이 주선한 이상, 적어도 그것을 각오하고 단행해야 하는 만남이었다. 결혼에 대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데 결혼을 전제로 하는 만남이라니. 이해가 되질 않았다. 여러 번 거절 의사를 밝혔음에도 자꾸만 같은 내용을 들이미는 엄마가 미웠다. 차마 밥상을 뒤엎진 못했지만 그에 준하는 정도로 싫은 내색을 했다. 물론 그것은 고모의 실없는 부탁과는 달랐다. 그것은 엄마의 최선이었고, 딸을 위하는 엄마의 마음이었다. 그래서 엄마는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숙제를 하는 심정으로 그를 만났다. 그의 인상이나 대화의 흐름은 나쁘지 않았다. 우리는 신앙인이라는 공통점이 있었기에 그가 여러 이야기를 주도했고, 나는 들어주거나 질문에 답하며 대화가 어느 정도 길게 이어졌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첫 만남부터 내게 답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는 결혼할 여자를 찾고 있었다.


부담의 극치를 느꼈다. 나는 이미 대화를 마무리할 궁리를 하고 있었다.(여자는 부담을 느끼면 도망간다는 말에 적극 공감한다. 남자들은 이 말을 반드시 기억하길 바란다.) 그래도 어른들이 주선해 주신 자리였기에 나는 최선을 다했다. 남자는 데려다주겠다며 뭔가 아쉬운 것처럼 굴었지만 나는 여지를 주고 싶지 않았다. 산뜻한 기분으로 헤어졌다. 숙제를 마쳤으므로. 


엄마는 그 뒤로 '한 번만 더' 만나보기를 종용했다. 나는 분노를 넘어서 절망했다. 원래부터도 엄마와는 말이 안 통했지만 이렇게까지 내 마음을 무시하다니, 아무리 호소해도 될 일이 아니었다. 나는 기도했다.


'하나님, 이 상황이 너무 힘듭니다. 이 시간이 얼른 지나가게 해 주세요.'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우연히 가수 소향의 간증 영상을 시청하게 되었다. 그녀가 스무 살에 결혼하게 된 스토리는 어딘지 나와 비슷해 보였다. 결혼하기에 이른 나이인데 그녀는 어떻게 마음을 먹게 되었을까? 자의가 아닌 타의로 시작된 '결혼'이라는 화두에서 그녀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결혼이 네게 유익이 될 것이라
내가 5월에 행하리라


하나님께서 그녀를 결혼으로 몰고 가시는 과정에서 소향이 받은 응답이었다. 그녀는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믿었고 순종했다. 그리고 의례적으로 결혼 이후 진행하는 산부인과 검사를 통해 자궁의 이상을 발견하게 되었다. 발견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던 종양이라서, 조금만 더 늦게 발견했다면 생명의 지장이 있었을 정도였다. 보통 스무 살에 산부인과 검사를 받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러므로 스무 살의 소향에게 결혼은 정말 유익이 되었다.


내게도 결혼이 유익이 될까? 하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다. 어떤 식으로 유익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결론적으로 결혼은 내게 분명한 유익이 되었다. 나는 결혼을 '접붙임 사건'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하나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분이셨다. 이 시점에 결혼이 진정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남자는 그때까지도 내게 아침마다 카톡을 했다. 그저 날씨 이야기를 하거나, 말씀이 적힌 이미지 사진을 전송하는 게 다였다. 나는 예의상 답장을 할 뿐이었다. 더 이상 그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을 때쯤 나는 그를 다시 한번 만나기로 결심했다.


이 사람이 내가 기도해 온 배우자라면 내게 그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을 주시길 기도했다. 그를 만나러 서울에 간 날, 나는 그와 뜻하지 않게 오랜 시간 대화하게 되었다. 사실 그와의 약속은 마침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던 친구를 만나러 가는 김에 잡은 것이었다. 엄마의 두 번째 종용과 소향의 간증으로 혹시나 하는 마음을 해소하기 위해 계획된 짧은 만남이었다.


그러나 당시 인턴이었던 친구는 회사의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주말에도 출근해야 했고, 나는 갑자기 시간이 붕 뜬 바람에 여유가 생겨버린 것이다. 그와 차 한잔을 하러 만났다가 식사까지 하게 되었고, 졸지에 여의도 공원에서 산책까지 하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날, 여섯 시간이 넘게 대화를 했다.


그는 두 번째 만남에서도 첫 번째 만남에서와 같이 대답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때처럼 부담스럽지가 않았다. 이 사람이라면 내가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함께 열심히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 보수적이고 다소 가부장적이지만 그만큼 가장의 역할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 나에게 자신의 월급을 그대로 말해주면서, 자신과 결혼하게 된다면 맞벌이는 꼭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 줄 거라는 말을 하며 나를 설득해도 모자랄 판에, 학습지 교사라도 해야 한다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싫지가 않았다. 그런 척, 안 그런 척, 온갖 척을 하며 살던 나처럼 꽁꽁 포장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겉과 속이 똑같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해 오던 중이었다.


모든 대화의 끝에 '나와 결혼할 의사가 있는지'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그의 물음에 나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긍정의 대답만 했을 뿐인데, 추진력이 끝내주는 남편 덕분에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마치 다음 데이트 날짜를 잡듯이 결혼 날짜를 정했다.


"결혼식은 이 날로 할래?"

"지금 다니고 있는 연구소 계약이 이때 끝나요."

"아, 그럼 이 날이 좋겠다."


그렇게 우리도 5월에 웨딩마치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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