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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Jun 22. 2024

꿈꾸게 하신 가정

내가 과부가 된다고?


"장가갈 수 있을까."


커피소년의 노래가 나오기 전부터 나는 '시집갈 수 있을까'를 생각했고, 결론은 '없다'였다. <결혼 전 지구 멸망설>이 내 안에 단단히 똬리를 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을 꿈꿀 수 있었던 건 내가 고등학생 때 겪은 사건 때문이다.


고등부 겨울 수련회 때 나는 앞자리쯤 앉아 기도를 하고 있었다. 청소년들을 위한 설교는 역시 비전에 대한 것이었는데 나는 비전이 없었다. 도저히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는 상태였다. 당장 어느 학과를 가야 할지 조차 알 수 없던 나는 막막한 심정으로, 나의 미래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그때 감은 눈꺼풀 사이로 책이 보였다. 펼쳐있는 책에는 알파벳이 가득 적혀 있었는데 그게 영어인지는 잘 모르겠던 찰나, 알파벳 몇 순서대로 책 속에서 튀어나왔다. 기도하면서도 순간 이 글자들을 기억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기억한 알파벳은 아래 단어로 조합되었다.


'RUTCH'


수련회 기도시간이 끝나고 숙소에 갔을 때, 친구의 핸드폰을 빌려 그 단어를 찾아보았다.


"그런 단어 없는데?"


그럼 그렇지, 무슨 복권도 아닌데. 숫자가 쓰인 공을 뽑는 것처럼 내 무의식대로 뽑아낸 거겠지. 아무 의미 없는 단어를 의미가 있는 것처럼 여겼던 내 모습이 멋쩍었다. 그런데 그냥 넘기기에는 아무래도 미심쩍었다.


수련회 전체 일정이 끝나고 집에 돌아왔다. 마침 책상 위에 놓인 영어사전이 보였다. rutch라는 단어는 역시나 사전에 없었다. 그런데 그 단어를 찾다가 ruth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단어의 뜻풀이는 예상 밖에 사람 이름이었다. 성경 <룻기>에 나오는 성경 인물 룻.


룻이라는 여자가 성경 속에 나오는 인물인지 그때 처음 알았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요한, 베드로 정도는 들어봤다. 아니지. 여호수아, 바울과 바나바, 스데반, 삭개오, 심지어 루디아도 들어볼만큼 설교도 열심히 듣고 공과공부도 열심히 했는데! 룻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여인이 성경 인물이라니.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룻이라는 여인을 주제로 한 설교를 들어본 적도 없었거니와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었다.


기억하는 알파벳과도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았으니 그냥 사람이름이었다면 무시했겠지만, 성경인물이라는 점 때문에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 자리에서 룻기를 찾아 읽어봤다. 룻기는 총 4장으로만 기록된 구약성경이라서 금방 읽었다. 그런데 읽고 나니 더 알  없었다. 과부가 된 룻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내가 결혼을 하더라도 곧 과부가 될 운명이라는 뜻인가? 하나님이 기도 중 보여주신 단어에서 알파벳 C가 빠진 단어가 성경 속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그녀와 나의 관계성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나는 다시 하나님께 묻기로 했다. 다음날 새벽기도를 나갈 테니, 룻기를 통해서 내게 말씀하시려는 것이 있으시다면 내가 알게 해 주시라고. 나는 모르겠으니 가르쳐주시라고. 잠이 부족한 고등학생이 새벽기도에 나가는 건 쉽지 않았지만 나는 알아야 했다. 아무리 그래도 과부가 될 운명에서는 벗어나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다음 날부터 나는 평일 내내 새벽기도를 나가야 했다. 목사님께서 첫날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번주는 룻기에 대해 설교하겠습니다. 룻기는 4장밖에 없으니, 하루에 한 장씩 살펴볼 예정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날에는 마무리 설교로 룻기를 아우르겠습니다."


나는 정말 놀랐다. 출근하는 직장인들을 위해 새벽 예배는 보통 간단하게 진행할 것이라는 나의 예상을 깨고, 목사님은 새벽부터 강해를 하실 작정이었다. 나를 위한 설교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이방인, 그리고 여자. 당시 이방 여인은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 이방 여인이었던 룻은 심지어 과부였다. 성경을 통틀어서 하나님이 가장 불쌍히 여기신 존재가 고아와 과부였을 만큼 룻은 사회적 약자였다. 그런 룻이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는 믿음의 고백을 하며 시어머니를 따라왔다. 그 땅에서 보아스를 만나고,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다. 그리고 그 가문에서 예수님이 나왔다. 이방여인에 과부였던 룻이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 여인이 된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애초에도 성경에서 말하길 하나님은 약한 것들을 택하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한다는 말씀이 있었다.(고린도전서 1:27-28) 없는 것들에 속하는 나는 이 말씀에 적잖이 위로를 받았었다. 그런데 룻을 통해 내게 하신 말씀은 내 인생을 두고 더욱 긴밀하게 맺어주신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당시에도 나는 이것이 나를 통해 믿음의 가정을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여겨졌다. 당장 어느 학과를 야 하는지에 대한 진로보다도, 내 인생을 어떻게 이루어가시겠다는 하나님의 큰 그림, 커다란 응답이었다. 부모님에 대한 공경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다면, 보잘것없는 배경을 가진 나를 통해서 믿음의 가문과 역사를 이루어가겠다는 약속이었다.


그 시절 나의 부모 공경은 부모님을 위해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어여삐 봐주셨던 것 같다. 부모님으로 인해 아팠던 마음을 부여잡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 바라보며 OOO, □□□씨라는 이름으로 하나님께 두 분을 올려드렸다. 부모님을 창피해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았으며 두 분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 이후 결혼식과 출산, 결혼생활을 하며 시부모님으로부터 이상적인 부모 상을 마주하고선 나의 부모님에 대한 실망을 뒤늦게 느끼긴 했지만, 그만큼 그 시절의 내가 얼마나 부모님을 사랑하고 사랑하기 위해 노력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나의 보아스가 될 배우자와 시어머니에 대한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나의 보아스라 함은, 나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길 바랐다. 그리고 시어머니는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만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길 바랐다. 하나님을 믿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일그러진 영웅처럼 자신만의 하나님을 창조해내지 않고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믿음을 가진 어머님, 내가 믿고 따를 수 있을만한 부모이길 바랐다. 믿고 따르고 의지할 만한 부모가 없는 사람에겐 그런 어른의 존재가 절실한 법이다.


그렇게 하나님은 목사님을 통해서, 룻을 모르는 내게, 룻을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셨다. 그리고 룻을 통해 내게 이루실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셨다. 그것은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결혼 전 지구 멸망설>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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