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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May 19. 2024

아끼는 마음


박완서 작가의 문장은 대체로 호흡이 길다. 한 문장이 한 문단만큼 길게 쓰인 것도 있다. 보통 일상에서 이렇게 긴 호흡의 문장을 만나면 긴 한숨이 나온다. 문장은 호흡이 짧을수록 가독성이 높기 때문이다. 긴 문장은 주어와 술어의 호응 관계를 파악하는 일도 수월하지 않고, 자칫하다간 길을 잃어버리기 쉽다.


그러나 긴 호흡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문장은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나까지 그 문장에 자연스레 포함된다. 마침표로 세보자면 몇 문장 안 읽은 것 같은데 벌써 책 한 장이 넘어간다. 그래서 박완서 작가의 글은 아껴읽게 된다. 아껴읽는다는 건 허투루 읽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녀의 문장에는 간혹 사전을 찾게 하는 단어들이 있다. 문장에 포함된 단어가 무슨 뜻인지 찾아보기 위해 멈추다 보면 자연스레 천천히 읽게 된다. 그렇게 알아낸 단어의 뜻을 대입하여 작가의 문장을 다시 읽어보면 한 번도 어색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작가가 표현하려고 했던 의 의도를 더욱 정확하게 이해하게 된다.


구태여 유식해 보이려고 그 단어를 용했다는 느낌보다는, 도리어 독자를 배려하여 이 문장의 뜻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친절함마저 느껴졌다. 그렇기에 내게 박완서의 글은 참고서였다. 국어사전의 적절한 예문이었다. 그런 수고를 들여 읽어낼 만한 가치가 있는 글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박완서 작가의 책을 읽고 있을 때 조금은 성가시게 말을 건네온 교생선생님께 이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말하장면보다도 그때 선생님 눈빛과 편지의 내용이 기억에 남았다. 교생실습을 마치고 떠나기 전, 선생님이 남겨주신 엽서에는 '말을 하는 나의 모습이 너무 예뻤다'는 감상평이 쓰여 있었다.


그땐 그것을 그저 작별의 인사치레로만 여겼다. 길지도 않았던 실습기간, 몇 마디 말도 나누지 않은 채 서른 명이 넘는 아이들에게 일일이 엽서를 쓰기 위해선 작은 대화에도 의미를 부여했을 법이라고. 적어도 나와의 관계에선 그랬다. 그게 그 선생님과 나눈 대화의 거의 전부였으니까. 그런데 왜 지금까지도 그 선생님이 남긴 경탄의 표정과 엽서의 내용이 생각나는 까. 예상치 못했던 표정과 오버스럽다고 느낀 감상평이라서였을까. 


선생님의 그 표정과 반응은 내가 전혀 기대하거나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의식한 것이기는 했다. 나는 그날따라 쉬이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있었다. 원체 책장을 빨리 넘기는 편이 아니었지만, 나를 지켜보던 선생님의 시선이 의식되어 그랬던 것도 같다. 그 시선 끝에는 무슨 책을 그리 '열심히' 읽냐고 묻는 선생님의 질문이 따라왔다. 나는 '천천히' 읽는 이유에 대해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선생님의 표정과 말을 지금까지 간직한 것은 아마도 아끼는 나의 마음을 아껴준 덕분이리라. 내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내 마음을 어여삐 보았던 그 마음. 당시에는 어색했지만 무엇을 아끼는 마음을 알아봐 준 그 마음의 가치를 이제야 알 것도 같다. 이제야 선생님의 그 마음이 고맙다.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서 행간의 의미는커녕, 떡하니 적힌 글자도 제대로 훑지 않는 무성의가 익숙하다. 오고 가는 대화 속에서도 너무나 쉽게 주도권을 점령하고, 상대의 말은 제대로 들으려 하지 않는다. 섣불리 판단하고 말꼬리를 잡으며 혼자 오해하기도 부지기수다.


그러니 아끼는 마음은 어여쁘다. 아끼는 마음은 쓸데없는 곳에 마음을 낭비하거나 다치지 않으려는 게 아니라, 무엇을 소중하게 여겨 보살피거나 위하는 마음이다. 내가 읽고 있는 책을, 내가 만나는 문장과 사람을 그렇게 아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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