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이 May 23. 2024

나는 엄마와 다르게 살기로 결정했다


엄마는 소일거리로 운동 삼아 폐지를 주우러 다니는 거라고 했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모아진 폐지들을 처분하기 전까지 엄마의 집 앞마당은 매우 지저분했다. 엄마는 박스조차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다. 엄마는 박스만 주워오지 않았다. 박스 옆에 있던 것과, 박스 안에 있던 것을 함께 가지고 왔다. 그리고 그것을 손수 분리해 내었다. 


어느 때에는 누군가 봉해서 버린 쓰레기봉투를 통째로 들고 왔다. 아직 빈 공간이 있어, 아까운데. 하고. 그러면서도 남은 빈 공간만 채워서 버리지 않았다. 쓰레기봉투에 있던 쓰레기들을 꺼내서 다른 쓰레기봉투에 옮겨 담았다. 그리고 빈 쓰레기봉투를 씻어서 널어두었다. 앞마당에서는 냄새가 났다. 외출하거나 돌아올 때, 나는 도망치듯 나서거나 도망치듯 숨었다.


엄마는 지금도 가끔 폐지를 줍는다. 아마도 오랜 기간 눈에 불을 켜고 다녔던 탓에 폐지는 여전히 눈에 띌 것이다. 눈에 밟힐 것이다. 엄마는 박스를 발견하면 보물을 발견한 듯이 기분이 좋다고 했다. 다른 사람 눈에는 버려지는 쓰레기에 불과한 것을, 자신이 발견해서 돈으로 교환할 수 있다는 것에 뿌듯해하는 듯도 했다. 이것도 엄마에겐 매우 획기적인 일종의 수익화인 셈이다. 그러나 엄마의 시선의 방향이, 그 시선이 머무는 대상이 왜 하필 고물일까에 대해서 생각할 때면 마음이 무겁다. 무급의 현실 속에서 자신의 생산성을 그런 식으로나마 발휘하려 했던 엄마를 나는 어떻게 미워할 수 있을까.


어느 전문가가 고물을 모으는 사람의 심리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본인을 고물과 동일시 여기는 심리에서 비롯된 행동이라고. 가치가 다해 버려진 고물들 속에서 쓸모를 찾아내는 순간,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는 것만 같은 감정을 느낄 거라고. 슬프게도 그 말이 맞다면 엄마는 고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사람인 것이다. 재활용은 환경을 위해 좋은 것이고 소일거리 하는 노인에게 웬 극단적인 비약이냐 할 수도 있지만, 어느 정도는 타당한 분석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봐온 엄마는 자신의 쓸모를 아끼는 것으로 입증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어머니가 지출을 통제하려 하면 할수록 아버지는 수입을 통제한다는 사실이었다. 이만해도 살아냈으니 또 그렇게 살아낼 줄 알고, 딱 죽지 않을 만큼의 돈만 건네던 그 잔인함에 어머니는 치를 떨었다.

  

엄마의 그 기분을 나도 안다. 평범함 속에서 가치를 발견해 낸 기분을 안다. 황무지에 핀 장미꽃의 향기를 안다. 그런 존재가 더 기특하고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것을, 그 마음을 안다. 사람은 내가 가치를 두고 있는 것에 시선이 가게 마련이다. 그리고 시선을 둔 그 방향으로 걸어가게 되어있다. 그러니까 나는, 고물 속에서 보물을 발견한 듯이 눈을 반짝이는 엄마의 심정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엄마와 같지 않다. 나는 나의 쓸모를 그런 방식으로 입증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결핍과 은 것들을 모으며 함께 널브러져 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엄마를 사랑하지만 엄마와 다르게 살기로 결정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