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난민>은 최근 일본에서 급증하고 있는 1인가구와 싱글화 현상에 대해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1인 가구 내에서도 계급, 직업, 성별, 소득 등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싱글화로 인한 경제적 빈곤과 사회적 고립을 우려한다. “가족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 더불어 자신을 필요로 하고 소중히 대해 주는 존재가 없는 사람들”을 ‘가족 난민’이라 명명하며, 최근의 싱글화 현상이 가족 난민 증가의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싱글화 현상에 힘입어 가족을 꾸린 자와 그렇지 않은 자 간의 심대한 ‘가족 격차’가 발생할 것을 우려한다. 따라서 저자는 경제적으로 다소 궁핍한 비자발적 1인 가구를 문제적인 집단으로 호명하며, 이에 대한 원인과 사회적 해결방안을 모색한다.
이 책에 따르면 이러한 가족 난민의 문제는 최근에 대두되었는데, 그 원인은 일본의 사회 구조적 변동에서 찾을 수 있다. 과거 전통가족의 경우에는 싱글들이 가족 내부로 포섭되어,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경우가 부재했지만, 전통적인 대가족이 와해된 현대사회에서는 가족들이 그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부모에게 ‘얹혀사는’ 패러사이트 싱글의 경우 이들을 거두어 들이는 가족 구성원들이 고령화됨에 따라 이제 이들은 더 이상 부모에게 의존해서만 살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가족이 전에 맡아왔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처지에 이르게 되자, 비자발적 싱글들은 몸과 마음 모두 ‘발 붙일 곳 없는’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가족 난민>은 화려한 ‘골든 세대’ 싱글과 고독한 독거노인이라는, 1인 가구에 대한 양극화된 시선에서 벗어나, 실증적이고 역사적인 분석을 통한 가족의 학문적 탐구를 지향한다. 1인 가구를 협소하게 규정짓지 않으며, 1인 가구의 현실적인 삶을 조명하며 이들이 현대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톺아본다. 하지만 제시한 분석과 해법은 결국 가족주의를 강화하는 입장으로 귀착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을 수도 있다. 이 서평에서는 우선 <가족 난민>이 한국 1인 가구에 시사하는 바를 분석하고, 이 책에서의 주장과 방안이 정말 타당한지 검토해본 후,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성에 대한 언급으로 끝을 맺고자 한다.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
한국의 1인 가구는 여타 나라와 마찬가지로 급격한 증가세에 있다. 1970년데 3.7%에 그쳤던 1인 가구 비율은 2010년에 이르며 23.9% 육박하는 급증세를 보인다. 또한 1인 가구의 연령별 분포는 비교적 고른 편인데, 2010년 30세 미만이 26.7%, 30~39세 가 25.0%, 40~59세가 26.8%, 60세 이상이 21.4%를 차지한다. 이는 1인 가구가 한국사회에서 흔히 생각하는 ‘영앤 리치’인 화려한 싱글과 독거노인이외에도, 전 연령에 걸쳐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는 점을 나타낸다. 따라서 <가족 난민>에서 드러나는 만혼화로 인한 싱글들과 이혼으로 인한 싱글들이 한국사회에서도 등장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가족 난민>은 독거 노인 이외에 비자발적 미혼 싱글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데, 이는 독거노인에 대한 연구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국 사회의 연구 경향에 좋은 자극제가 될 수 있다. 가구의 등장이 사회적 대세가 되고, 연령에 상관없이 증가하는 추세에도 한국의 연구는 독거노인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한국사회의 1인 가구 연구는 가족이나 복지 영역에서 정책 대상자로서 혼자 사는 노인에 대한 연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할 만큼 한국사회의 1인 가구 연구는 독거노인에 대한 연구에 치중되어 있다. 1인 가구에 대한 연구이지만 그것은 결국 독거노인에 관한 연구와 등치되어 왔고, 따라서 1인 가구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가 아직은 부족한 실정이다. 따라서 <가족 난민>은 특정 연령에 국한되지 않은 비자발적 1인 가구에 대한 향후 연구의 이정표가 될 수 있다.
또한 한국사회는 견고한 가족주의 이데올로기로 인해 일본사회에 비해 패러사이트 싱글이 비교적 비가시화되는 경향이 있다. 한국사회의 경우 한국전쟁, 6월 민주항쟁 등 현대사의 굴곡진 경험으로 인해 가족끼리 똘똘 뭉쳐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가족주의 이데올로기가 뿌리박혀있다. 더불어 국가 성장주의 기조 아래 압축적 근대화를 경험한 한국 사회는 급격한 사회변화를 가족의 울타리로 견뎌내었다. 더 나아가 1997년 이후 신자유주의 흐름과 더불어 발생한 노동 유연화, 경제 불황 등의 사회적, 경제적 위기에도 가족 내부의 생존력 강화로 고난을 타개해왔다. 즉, 한국사회는 일본사회보다 가족이라는 사적 안전망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고, 이로 인해 패러사이트 싱글들은 사회 문제로 부각되지 않아 왔다.
따라서 <가족 난민>은 아직 패러사이트 싱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지 않은 한국사회에 경고의 메시지를 던진다고 할 수 있다. 보다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패러사이트 싱글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실정은 패러사이트 싱글의 부재 혹은 이들을 보듬어 줄 견고한 사회보장 시스템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일본보다 지나치게 강한 가족주의적 경향으로 인해 패러사이트 싱글의 존재가 은폐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었을 경우, 지나친 가족주의의 폐단과 이들을 둘러싼 사회경제적 문제(실업과 같은), 그리고 이들의 경제적 빈곤을 예방할 안전망의 구축을 논의해야 한다. 따라서 <가족 난민>은 한국사회에도 존재할 가능성이 농후한 패러사이트 싱글에 대한 연구를 촉구하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
저자의 주장은 정말 타당한가
<가족 난민>에서 저자는 가족 난민의 문제가 전통적 가족의 와해와 1인 가구의 급증이라는 가족과 가구의 사회변동과 맞물려 발생한다고 지적하고 있고, 따라서 가족 난민의 문제는 가족의 문제로 귀결된다. 가족 난민의 사회적 불안정을 거론하며, 이로 인한 싱글과 가족 간의 가족 격차의 발생 해결을 방지할 방법을 고안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일차적으로 가족을 형성하지 않아도 개인의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사회보장제도의 구축을 주장하지만, 결혼의 성공 확률을 증대시키기, 곤카쓰(결혼을 위한 활동) 등을 권고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저자의 분석 기저에 “가족을 형성하면 안전이 보장되는 반면, 가족을 형성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가족 난민’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이러한 전제는 가족을 긍정적인 것으로, 가족을 이루지 못한 싱글을 부정적인 것으로 이분법적 대립구도 하에 포섭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저자가 ‘가족 난민을 방지하기 위해 사회가 할 수 있는 일’로 언급한 “파트너가 없더라도 혹은 일시적으로 파트너 없이 생활하게 되더라도, 고독한 상태에 빠지지 않고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생활을 계속해 갈 수 있는 삶의 구조를 만드는 것”은 가족은 정상의 범주로, 비가족을 변화해야 할 일시적인 현상으로 규정짓는다는 점을 방증한다.
‘가족 난민’이라는 용어 자체도 사실은 문제적이다. “가족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 더불어 자신을 필요로 하고 소중히 대해 주는 존재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정의에는, 가족을 안정, ‘소중히 대해주는 사람들’이라는 규정적인 속성으로 고착시킨다. 이는 현대사회의 다양한 가족 형태를 반영하지 못한 설명이며, 전통적 가족에 대한 오랜 편견으로 비롯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과거와 같이 오늘날 가족에도 진실된 사랑과 상호간의 신뢰에 기반 한 관계라는 당위가 존재하고, 실제 현실에도 그러한 가족이 있지만, 이를 전체 가족의 양상이라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치솟는 이혼률과 싱글의 증가가 그 증거이며, 가족에 대한 ‘정상’과 ‘긍정’이라는 고정적 규정은 친밀한 관계라는 이유만으로 자행되는 가족 내 폭력, 학대 등의 문제를 은폐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렇게 가족을 안정과 등치시키는 저자의 분석은 가족이 한 번 형성되면 고정적이고 불변하는 운명 공동체이며, 가족 형성 이후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즉, 저자는 가족이 형성되면 안정을 담보한다고 가정함으로써 가족 형성을 장려하고, 가족을 미처 꾸리지 못한 사람들을 보호하자고 주장하지만, 가족은 형성됨으로써 완성되는 공동체가 아니다. 가족은 결혼과 출산을 통해 완벽하게 구축되는 공동체라기보다는, 한 개인의 생애 속에서 꾸준히 형성해나가야 할 과정으로서 구성되는 공동체이다. 환언하면 결혼을 통해 법적으로 가족의 위치를 점했다고 해서 바로 안정이라는 성과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가족은 구성원 모두가 부단한 노력을 통해 안정감을 쟁취해내야 할 과업을 맡은 공동체인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1인가구의 경제적 궁핍과 심리적 고독으로 인한 ‘가족 난민’의 문제는 가족 문제와 일정정도 상관관계를 갖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사회 문제 혹은 경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가족을 꾸리지 못해’ 경제적으로 하층민의 지위로 전락하고 고립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유연화로 인해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고, 이것이 저임금, 경제적 빈곤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심리적 고독은 과도한 원자화와 개인주의로의 급격한 전회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가족을 꾸려도 정서적 애착과 신뢰가 결여되면 심리적 고독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고, 싱글이어도 경제적으로 부유하다면 경제적 빈곤 문제를 느낄 리 만무하다.
저자가 역설하는 ‘가족 난민’의 문제는 가족, 빈곤, 고립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부각되는 현안이다. 여기서 ‘가족’은 여태 사회 문제를 대신 책임져왔던 가족의 부재라는 점에서 가족 난민의 등장에 빌미를 제공하기는 하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빈곤과 고립의 문제이다. 즉, 애초부터 잠재되어 있던 정치적, 경제적 문제였던 것이 가족제도의 사회구조적 변화라는 문제와 맞물려 수면 위로 부상한 것이다. 따라서 문제의 원인과 해법을 가족제도 내부에서 찾기 보다는, 경제적, 정치적 구조를 들여다보는 것이 우선이다. 물론 사회 문제에 대한 제대로 된 분석을 위해서 사회 내의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가족 제도를 살펴보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그것은 ‘가족 난민’ 문제에 있어서는 부차적이라는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
과거에는 그나마 끈끈한 가족의 존재로 인해 이러한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떠안을 안전망이 존재했지만, 저자가 지적하듯이 사회구조적 변화로 인해 그러한 안전망은 더 이상 신뢰하기 어려운 것으로 판명 났다. 하지만 가족이 사회 문제를 모두 떠안았던 과거의 모습을 상찬해서는 안 되며, 과거와 같이 가족주의를 강화하자는 과거 회귀적 방안을 내놓아서도 안 된다. 사회 안정망이 부재한 상태에서 사회 문제를 오롯이 가족의 책임으로 돌렸던 과거의 관습이 잘못되었으며, 가족이 국가의 사회적 책임을 은폐하는 데 일조했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따라서 책에서 저자가 언급하는 방안 중에서는 일리 있는 주장이 있지만, 저자가 언급한 (전통적) 가족의 형성과 결혼을 장려하는 정책 등의 방안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저자는 가족이 없이도 안정감 있는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안전망 확보에 동의하면서, 가족을 형성할 수 있도록 촉진하는 정책 마련을 주장한다. 예컨대 저자는 “만일 사회보장의 혜택이 개인 단위로 제공된다면 가족은 구성원의 복지를 전적으로 책임지고 돌봐 주어야 한다는 중압감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그에 따라 자신의 가족을 만들고자 하는 비율도 증가하게 될 것으로 생각 한다.” 이는 사회보장의 혜택 제공을 가족 형성을 장려하는 기반으로 활용하자는 논리이다. 즉, 개인의 행복과 삶의 질 향상에 주안점을 두기 보다는, 여전히 가족의 삶이 중요하다는 입장이며, (전통적) 가족의 형성이 개인의 행복으로 이어진다는 암묵적인 전제를 함축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다시피 가족의 행복이 곧 개인의 행복이라는 논리는 여러 반례들로 인해 보편화될 수 없으며, 이미 개인화와 핵가족 해체가 도래한 현대사회에서 가족주의를 고수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기존에 내재했던 가족 문제를 정확히 인지함으로써, 현대사회의 물결을 거스르지 않고 인정하되, 기존의 병리적 현상을 해결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주력해야 한다. 그리고 ‘더 나은 사회’의 핵심은 가족이 아니라 개인의 행복과 삶의 질 제고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가족이 아니라 개인 단위의 사회보장제도를 창안해내야 한다는 저자의 견해에는 적극 동감하는 바이다. 가족 단위의 사회보장제도는 가족을 형성하지 못한 1인가구를 소외시키는 것이며, 이들에게 예기치 못한 불행이 닥쳤을 경우 인간다운 삶을 살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다. 핵가족 형성에 반대하고, 핵가족을 무조건적으로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 형성 여부에 상관없이 개인의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뿐만 아니라 가족이 아니라 개인에게 역점을 둠으로써 가족 내부에서 발생하는, 은폐되기 쉬운 여러 문제들을 사회적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좋은 계기가 된다. 개인 단위의 사회보장제도는 가족을 형성한 이에게도 가족이라는 친밀한 관계 내부에서의 개인의 삶을 보장받고, 1인 가구에게는 이 세상을 오롯이 혼자 헤쳐나가야 한다는 중압감으로부터 해방시킨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가족과 비가족의 이분법적 구도를 타파하는 것이다. 가족은 우리, 비가족은 남이라는 배타적인 태도는 가족 이기주의를 초래하고, 개인의 문제는 가족 내부에서만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낳는다. 우리는 가족 이외의 공동체와도 상호작용하며, 친구 등 다양한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 따라서 ‘가족’이라는 운명공동체를 반드시 형성해야만 망망대해같은 세상에서 생존할 수 있다는 편견을 버리고, 가족 외에 정서적 애착을 갖는 타인들과의 연대의 가치를 높이 평가해야 한다. ‘따로 또 같이’라는 표현이 있듯이 일상의 모든 것을 공유하는 (전통적 형태의) 가족이외에도 필요할 때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여러 공동체와의 유대관계를 공고히 다져야 한다. 이것이 최근 들어 급부상한 1인가구의 심리적 외로움과 경제적 고난을 해소할 실마리라고 생각한다.
이와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가족 난민> 후반부에 실린 구보타의 주장이다. 구보타는 “앞으로 가족과 타인 사이의 어디엔가 위치한 중간적 관계-완만한 신뢰를 기반으로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의 비중을 얼마나 늘려갈 수 있을까가 관건이 되리라 생각합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앞서 언급한 가족-비가족의 대립구도에서 벗어나 배타적인 가족을 형성하는데 골몰하지 말고, 중간적 관계의 포용적인 태도를 견지하자는 입장이다. 이와 더불어 구보타는 “셰어하우스에 살면서도 생활의 장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서로 도울 수 있다면, 비록 이상적 가족의 기준에 미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충분히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이는 핵가족이라는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만 고집하지 않고, 견고한 가족의 울타리가 아니더라도 느슨하면서도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는 관계의 가치를 읽어낸 것이다.
이러한 이상적인 공동체와 가족을 건설하는 첫걸음은 가족 개념의 범위를 넓히는 것이다. 법적 가족으로 인정되지 않지만 ‘가족 같은’ 관계망에 포함된 사람들이라면 모두 가족의 범위내로 포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생활동반자법을 발의하여 ‘법적으로 공인된 전통적 가족’은 아니더라도 가족과 같은 친밀한 인생의 동반자이므로 가족이라고 인정해야 하며, 동성애자에게도 혼인을 허용하고 생활동반자로 인정해주어야 한다. 또한 혼인관계를 맺은 부부 두 쌍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생활을 하고,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면, 그것도 가족의 또 다른 형태가 될 수 있다. 따라서 필자가 제안하는 바는 가족 개념의 외연을 넓히고, 배타적이고 고정적인 가족이 아닌, 유동적이고 유연한 공동체를 건설하자는 것이다.
<가족 난민>은 현대 일본사회의 1인 가구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을 시도하고 있고, 이는 우리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그러나 책에서 주장하는 바는 가족주의를 공고화할 여지를 가지고 있고, (전통적인) 가족 형성이 좋다는 암묵적인 전제를 수용하고 있다. 이 책이 촉발시킨 ‘가족 난민’에 관한 논의에서 출발해, (전통적) 가족 형성으로 귀결되는 결론말고, ‘가족’과 ‘사회’ 자체에 대한 논의로 확장되어야 한다. 우리가 너무나 당연시하는 가족이라는 존재에 대해 정말 아무 문제 없는지, 1인 가구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가족의 부재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공동체의 모습은 무엇인지에 대한 토의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이렇게 되었을 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대사회의 거대한 흐름인 개인화에 발맞추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고, 가족이라는 명분 하에 억압되었던 개인들의 삶을 끄집어낼 수 있으며, 가족을 형성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해 안타까운 독립가구의 고충을 덜어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