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부에 꽂힌 가을

계란빵과 사라짐

by 빙빙

바람이 한가득 내 저고리 안을 후벼 파며 들어 안긴다 저고리 안쪽 작은 리본 매듭이 이내 풀린다 차가워진 바람의 온도에 화들짝 저고리 매무새를 다시 만진다

그렇지만 싫지 않다 바람의 손길이 얼굴을 떨구지 않고 바라본다 여름의 끈덕지근한 기분 나쁨이 사라지니 바로 폐부를 치고 들어오는 서늘함이라니 묘하게 이상하리만큼 사라진 이글거림에 놀랍사리 갑자기 화들짝 거린다


그럼에도 요 근래는 땀이 한 바구니 두 바구니를 가득 담아 쌓여가는 고구마 망태기의 한 귀퉁이를 차지해 갔다 그뿐이랴 저녁밤 어둑한 불빛 아래에서는 어미를 따라 가을볕에 말릴 것을 준비한다고 제법 바빴드랬다 머리와 똥을 제거한 멸치며 껍질을 까둔 호두며 도시 것들 눈치 보며 대학교 소나무 아래에서 따온 솔버섯이며 이내 태양의 식어간 열기에 단단하게 굳어간다 잘 말라간다 얼씨구의 계절이다 그만큼 절씨구 나는 절구에 빻아지는 마늘처럼 매콤한 눈물을 쏟아내며 힘들다 생각조차 못하고 시간을 보냈지만 절구에 왜 마늘을 빻냐고 같은 절구에서 빻은 밀가루로 만든 칼국수에서 마늘 냄새 나서 먹기 싫다고 괜히 어미에게 대들었다가 본전도 못 찾고 등짝을 힘씬 두들겨 맞았지만 말이다 그런겨 마을 어귀에 사는 그 녀석은 내 얼굴 한 번 쳐다도 안 보고 뒤집은 등을 펴지도 않은 채 대답만 한다 하긴 바쁜 때다 벼를 벨 때다 올해 농사를 마무리할 시기다 나에겐 그저 노동과 넉살 좋은 고봉밥의 시절이다 어미의 잔소리가 노동의 고됨을 뚫지 못하는 기분 좋은 시절이다 하수상한 것들이 가득 차도 이상하게 마음이 싱숭거릴 꾸물거릴 여지가 없는 시기다 그게 지금이란 시절이다

하지만 갑자기 코스모스 따라 다가온 바람 녀석은 달랐다 거북이 껍질같이 갈라진 내 마음속에 뭔가를 가져다주었다 봄이면 민들레 홀씨라고 단정 지어 말할 텐데 가을이라니 이 무슨 악질적 지랄인가


저 멀리 읍내에서 오는 버스가 보인다 누군가가 읍내장에서 계란빵 하나만 사다 준다면 이 싱숭생숭함이 필시 사라질 터인데 암 그렇고 말고 그 포실하고 포동한 녀석을 내 두 손에 소중히 한 번 감싸고 살살 퍼진 마가린향과 고소한 계란향을 맡고 내 의식이 끝나면 자연스레 한입 그리고 두입에 마치 제야의 고수처럼 끝내버리면 입안 가득 퍼지는 그 느낌 천상이 있다면 그곳을 다니는 듯한 그 기분 좋음 그것만이 가을바람이 가져온 고놈을 쉽사리 없애버릴 텐데 아닌가 땅콩과자란 녀석이 있어야 하는가 땅콩을 과자로 만들은 신의 가호가 나에게도 온다면 나 또한 무식하게 두툼한 손으로 농사만 짓는 게 아니라 달콤한 무언가를 만들어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아니 뭔 이 얄궂은 생각인가 내가 요즘 늦깎이로 사춘기란 걸 겪나



계란과자라는 이 무서운 녀석 나를 단번해 제압해 버린 그 마성의 맛 내가 달고 태어난 것 없이 태어났더라면 필경 계란장수를 따라 전국을 돌아다녔을 것이다 이건 분명하다 암 우리 어미도 이건 고개를 주아낙 거릴 것이다


태양의 이글거림을 받다 보니 등을 타고 땀줄기가 명백하게 흘러내린다 저 멀리 아낙이 한 명 보인다 마을 어귀 사는 그 녀석의 마눌님이다 동네에서 칭송이 자자하다 다른 건 난 모르겠지만 음식은 기깔나다 계란과자는 꽝이니 잘 삶은 통감자를 설탕과 소금을 넣고 들기름에 겉만 핥듯이 볶아서 가져온다면 내가 가슴에 코옥 박힌 이걸 빼버리고 훨훨 나를 수 있을 텐데 고 감자를 포옥 손으로 나누어서 양념간장에 찍고 기름 번들거리는 손으로 막걸리 사발을 쥐어들고 신명 나게 마신다면 나는 그저 아양 떠는 고양이처럼 꼬리를 쉬쉬 움직일턴디 말이지 말이다 나도 고런 여인을 한 명 만나서 어머니로부터 등짝의 독립을 선언하고 싶은데 원래 독립이란 게 쉽지 않으니 그런 시잘딱하는 것들은 그만 생각하자 아니지 근데 그게 또 내 맘대로 되는 긴가 바람이가 나에게 데려온 것을 내가 우찌 내 맘대로 그냥 고만둘 수가 있는가 이렇게 가슴 한 켠이 서늘한디 그런 건디 그렇지 암 어절씨구 지 맘대로 돌아가는 게 한 세상이라지만 에라이 모르겄다 이럴 땐 배를 가득 채우는 게 답이렸다 괜한 매만 벌지 말고 앉아서 쳐먹자 우걱거리며 넣다 보면 또 잊혀지겄지


그런데 말이다 잊혀진 내 많은 것들은 그저 연기처럼 하늘로 사라지는 것인가 또 그렇게 부엌칸에서 굴뚝을 통해 나아가는 연기처럼 그렇게 가는가 아닌가 오히려 딱지처럼 달라붙은 굴뚝 내 그을음처럼 계속 남아있는 건 아닌가 그렇기에 내 가슴에 코옥 박힌 이놈이 별것도 아닌 것 같은 이놈이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 게 아닌가 아닌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닌가 또 딴생각만 하는겨 그 녀석이 나무란다 그래 나만 이런 거겠지 주위를 둘러보니 새참을 마친 사람들이 하나둘 다시 낫을 잡는다 그래 나도 어여쁜 아내를 맞이하여 토끼 같은 자슥들을 낳으면 되겠지 그러겄지 암 얼씨구 좋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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