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지나가는 순간

늦여름이 지나가는 인생의 어귀에서

by 빙빙

언제나와 같은 새벽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며 시계를 보니 아침 6시 13분 여름의 무더위와 함께 해가 떠오르는 시간이 점점 도망가는 게 느껴진다 헤어밴드로 머리를 쓰다듬여 질끈 묶고 밥솥에 밥을 앉치고 쌀뜬물을 올려 된장찌개를 끓인다 감자를 슥슥 잘라 끓기 전 양파와 함께 넣고 한 소끔 끓고 나면 애호박과 다진 마늘 넣는다 그리고는 청국장 한 숟갈에 된장 두 숟갈을 풀어 보글 끓인다 마지막에 미리 잘라둔 두부와 쫑쫑 썬 대파와 청양고추 조금을 넣으면 우리 집 아침 인기 메뉴인 된장찌개 끝 보지 않아도 그려지는 마치 몸이 그저 움직이는 듯한 새벽하늘을 가로지르는 새의 날갯짓과 같은 익숙한 당연함이다 된장찌개는 나에게 아니 우리에게 그러하다 베란다에 만들어둔 나만의 작은 텃밭에서 상추며 오이며 뜯어서 쌈장에 찍어먹게 준비하고 계란프라이를 한다 주말에 미리 해둔 찬들을 몇 개 꺼내면서 애들 아빠를 부른다 말하지 않아도 식구수에 맞춰 숟가락과 젓가락을 식탁 위에 올려두며 자기 자리에 밥을 한 그릇 퍼서 앉는 그를 보니 우리가 살아온 시간이 헛되지는 않았구나 싶다 오늘 그는 정년 퇴임 전 친한 후배들과 회식을 한다고 했다 큰 딸이 얼마 전 사준 새 옷을 입은걸 보니 졸업식 전날 들뜬 고등학생처럼 그가 어려 보인다 오 아빠 오늘 근사한데라며 둘째가 빠르게 따라 앉는다 각자 계란프라이 하나씩을 밥그릇 위로 올려 식사를 시작하면 나는 식탁 옆 우리 집 막내 봄이의 아침밥인 사료를 그릇에 옮기면서 봄이를 부른다 봄아 봄아 맘마 먹자 큰딸 방에서 나오는 봄이가 우아한 요가 동작으로 큰딸의 비호 하에 등장한다 어휴 술냄새 남편이 얼굴을 찡그리며 큰딸을 향해 입을 연다 남편의 연속 공격이 시작되려는 그 순간 큰딸은 방어를 시작한다 오늘부터 오랜만에 휴가입니다 저는 흥청망청 놀 것이고 어제는 흥청이가 되었으니 오늘은 망청이가 될 것입니다 아버님은 아버님대로 즐거운 파티를 즐기세요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입니다 따박따박 어슴푸리 들으면 큰북의 어귀를 치는 나무끼리 마주치는 소리처럼 딱딱딱딱 한국어를 마치 네모반듯하게 발화하는 큰애의 말투에 남편은 바로 지쳐버렸다 알았다며 그냥 말없이 찌개를 먹더니 갑자기 아휴 짜다고 한다 두 딸은 나를 바라보며 아냐 엄마 맛있어라고 엄지를 척 들어준다 갑자기 남편의 볼멘소리가 귀여우면서도 짠해 봄이와 거실에 앉아 있다가 그러게 당신 혈압생각해서 덜 짜게 한다는 게 평소처럼 해버렸네 미안해요 라고 말한다 사실 고생했지 그도 나도 말이다 고향에서 결혼하자마자 상경해서 그땐 정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었다 큰딸 수정이는 배속에 있지 그 당시 애들 아빠는 대학생이었지 돈은 없지 배는 고프지 몸은 또 얼마나 힘든지 지금 생각해도 질끈 눈이 감키는 시기였다 그나마 애들 아빠가 과외로 벌어오는 돈과 시골 큰집에서 얻어온 먹을거리들로 어찌저찌 살았다 정말 말 그대로 어찌저찌 눈앞이 캄캄한 상태로 그냥 한 치 앞만을 만져가면서 살아갔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은 서울이라는 도시의 특성이었다 고향에 있었다면 분명 여고 동창생들과의 삶이 비교되어 견딜 수 없었으리라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지나가는 사람 중 하나인 수정엄마로 살아가는 삶이 당시엔 가혹했지만 지나고보니 그래서 지낼만 했다 어릴 적부터 나는 그냥 문자가 그리고 그 문자가 문장이 되어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음성이라는 화촉으로 바뀌어 타들어가는 게 좋았다 그래서 영어를 배울 때도 나는 열성적이었다 성문영문법책을 몇 번을 보았는지 귀퉁이가 찢어지도록 달달달달 외우고 외우고 또 외웠다 전라도 시골에서 외국인 볼일이 뭐 있냐며 눈 나빠진다고 불 끄고 자라고 볼매는 어미의 소리도 귀뒤로 흘려버렸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자 제2외국어를 선택해야 했다 나는 고민 없이 불어를 선택했다 극장 어귀에서나 나올 것 같던 음악과 같던 말을 너무도 배우고 싶었다 나의 열정을 알아봤을까 당시 젊은 여선생인 불어선생님은 나에게 불어시낭송 대회에 참여해 보는 게 어떻냐고 하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반대가 여간 크지 않았다 가부장적이던 아버지는 다 큰 딸내미를 어디 사람들 앞에 세워둘 수 있냐며 손사래를 넘어서 아예 빗장을 걸어 잠그셨다 그런 시대였다 그리고 그런 시대였기에 더 오기가 생기던 시대이기도 했다 여린 팔뚝에 높은 소프라노톤의 목소리를 가진 불어선생님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우리 집에 찾아왔고 어느 날은 막걸리 댓병을 자시고 오셔서는 반대에 반대에 반대를 하던 아버지를 설득시켰다 말이 오가는데 칼이 오가는 듯한 대화는 그날이 처음이었다 먼치라 다가가지도 못하고 나는 눈을 계속 꿈뻑거리며 그들의 대화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출전한 불어시낭송대회 선생님 사택에서 몇날며칠을 함께 합숙하듯 지내며 준비하였다 빅토르 위고의 나무 아래에서인 Sous les arbres 로 Ils marchaient à côté l’un de l’autre 첫 구절은 여전하게도 뇌리에 남아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한국어스러운 불어발음이었지만 나는 도대회까지 나가 우수상을 탔다 그리고 그 대회에서 지금의 애들 아빠를 만났다 그는 내가 낭송한 시의 마지막 구절인 Ma prière toujours dans vos cieux comme un astre, Et mon amour toujours comme un chien à tes pieds 를 유창한 불어발음으로 내 귀에 읽어주었다 몇 번이고 그러면 그걸 나는 영어로 바꾸어 다시 뱉어냈다 My prayer always in your heavens like a star, And my love always like a dog at your feet 그렇게 수정이도 우리에게 다가왔다 칡흩같던 어둠에 서린 가녀리고 얄팍하디 어린 사랑이었다 그 사랑이 현실로 바뀌어 뒤엉키고 40년이 넘었다니 나에게도 가슴이 콩딱 거리던 그런 날이 있었지 싶으면서도 그때의 내가 매우 낯설다 마치 어느 날인가 봤던 영화였던가 싶을 정도로 뿌옇고 희미해졌다 갑자기 봄이가 소파에서 뛰쳐나가 현관으로 꼬리를 흔들며 나간다 애들 아빠가 나가려나 보다 그의 재킷에 묻은 먼지가 없음에도 그냥 일상적 의식처럼 어깨에 먼지를 터는 손짓을 해본다 그리고 언제나와 같이 조심히 다녀와요라고 말한다 그가 나를 현관 신발장 위 거울로 바라보며 비장한 결연의 표정을 짓는다 나도 모르게 마치 여고생처럼 꺄르륵 웃음이 나온다 그래 이제는 그래도 우리 인생을 만지고 있는 거지 그렇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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