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사이의 사람이 있다는 즐거움
간판도 없이 댕그랑 들어가는 선술집 같은 곳이 있다 판교의 땅값에 치여 십여 평 남짓 오픈 주방에 바만 가득 찬 그곳은 합리적인 와인 가격으로 저녁 예약을 하려면 두세 달 뒤나 가능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오랜만에 H를 만났다 반년에 한 번씩은 만나던 그와 근 일 년 만에 만나게 되었다 H는 전 직장 동료로 성실한 타입의 사람이었다 여어-라며 마치 어제 퇴근길에 헤어졌다가 본 사람처럼 반갑게 인사를 한 뒤 H 옆자리에 앉았다 언제나와 같이 단정한 매무새에 깔끔하게 깎여있는 머리 H는 누가 봐도 전형적인 직장인이의 한 형태였고 정말 그는 회사에서도 그렇게 일했다 사실 H와 회사에 다니던 그 시절 나는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시기였다 나 스스로는 넝마의 시기라고 부르는 그 시기 항상 나사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렸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일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같은 회사 같은 조직에 8년을 몸담고 있던 나는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은 그런 상태여서 바다 위 둥둥 떠다니는 스티로폼 쓰레기 조각처럼 살고 있었다 H는 당시 보기 드문 경력 입사자로 오자마자 반듯한 외모와 태도 그리고 깔끔한 일처리로 많은 사람들에게 빠르게 인정을 받았다 그런 H에게 처음 느낀 감정은 부러움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H와는 거리를 좀 두었다 왠지 나의 어설픔이 더 뾰족하게 튀어나와 더 못나 보일까 걱정이 되었다 물론 H와 내가 직접적으로 업무에 연관이 되는 경우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H가 대뜸 나에게 차 한잔 하자며 내 자리로 왔다 너무 당황한 나는 에?라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H는 상냥한 표정으로 J과장님 조언이 필요한 일이 있어서요,라고 말했다 조언이라 조언, 어드바이스 그런 게 내가 줄게 있나 싶었지만 진지한 표정에 그냥 넘기면 너무 정 없어 보일까 사무실 안 공기가 나에게 촉수처럼 감겨와 H를 따라나섰다 H는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사 와 공원 벤치로 가자고는 했다 벚꽃이 흐드러지던 꽃들이 하늘에서 땅으로 흩어내려 와 새순이 스믈스믈 그 사이로 올라오던 그런 때였다 공원에는 이른 아침이었지만 생각보다 사람들이 꽤 있었다 벚꽃구경의 막차를 타려는 사람들이겠지 생각보다 바람이 싸늘해 자켓을 주악거리며 커피의 온기로 앉아있자니 H가 과장님 과장님은 무엇 때문에 출근하세요,라고 대뜸 물어봤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기이한 그의 질문에 나는 이 인간이 아침 댓바람에 정신이 나갔나 의아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럼에도 과장이란 사회적 지위를 생각하며 음 무엇이라 동기부여의 관점에서 물어보는 걸까 아니면 성과적 관점에서 물어보는 걸까 질문이 꽤나 넓은 범위군,이라고 말했다 갑자기 H가 웃기 시작했다 과장님 그거 아세요, 과장님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받으면 지금처럼 질문 내 단어의 의미를 다시 물어보시더라고요,라고 뒤이어 말하면서 더 크게 그는 웃었다 그런데 희한하게 기분이 그닥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환한 웃음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벚꽃 꽃잎들과 어울려 아침의 묘한 비린내와 어울려 꽤나 근사했다 그 단어가 정확하다 근사했다 근사한 장면이 되었다 그 뒤에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사실 정확히 기억나질 않는다 그냥 H는 나와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고 나를 선배라고 생각한다는 뭐 닮고 싶다는 뭐 그런 그냥 사회생활의 한 구석을 채울법한 말들을 나열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뭔가 그날 H는 진솔했다 그의 말투가 평소와 다르진 않았다 물론 굉장하게도 예의 바른 그의 태도가 걷혀서 그럴 수도 있지만 뭔가 묘하게 진솔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같은 사람이 맞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더니 그가 과장님 맥주 좋아하시죠, 오늘 퇴근하고 치맥 해요,라고 이야기를 마쳤다 내가 약속이 없고 무조건 자기와 시간을 보낼 거라는 확신이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묘했다 정말 이상했다 가슴이 철컹 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와이프에게 나 오늘 회식이 갑자기 잡혔어 미안 대신 내일 샛별이는 내가 씻기고 재울게,라고는 메시지를 보냈다 H와는 그렇게 친해졌다 희안한이라는 그 단어 밖에는 생각이 나질 않는 관계였다 그러고 나서 그와 같이 업무를 하게 되는 상황이 생겼다 H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준비해 왔다 넝마처럼 거적더기 같이 뒹굴거리며 다니던 회사 생활이 조금은 달라졌다 예전의 내가 느껴졌다 열띄게 토론하고 문서 정리하다 야근을 하는 날도 생겼다 퇴근길에 항상 H와 맥주 한잔을 하고는 집으로 갔다 솔직히 재밌었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일한게 언제였던가 일하는 맛이 이런 거지 그래 이런 게 세상 사는 맛이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작성한 신사업 보고서는 결국 상무에게 대차게 까여서 시작의 시자도 못 적고 세상을 하직하였다 나는 많이 정말 많이 마음이 다쳤다 회사에 대한 일말의 기대감도 사라졌다 결국 전보다 더 일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허송세월을 보냈다 H는 나와는 달랐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우리가 제안한 사업의 내용을 조금 바꾸어 보고를 다시 하였고 그가 발표한 내용은 내부적으로 꽤나 호평을 받아 그는 그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H와 어색한 사이가 되었다 나는 H의 얼굴조차 보기가 싫어졌다 멀끔하고 잘생긴 그의 얼굴이 그렇게 싫어졌다 그의 다정한 말투도 싫어졌다 그렇게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싫어질 때쯤 H가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그가 그만두다니 이상할 따름이었다 그래도 옛정이 있어 그가 그만두기 전 우리가 단골로 다니던 이자카야에서 함께 맥주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돌연 H가 약속을 취소하였다 그리고 한 3년을 연락이 없이 지냈다 나는 그냥 또 그럭저럭 살아갔다 차장에서 진급 누락되긴 했지만 뭐 그 또한 어떠하리란 생각이었다 애들은 큰 문제없이 크고 있었고 아내도 그다지 내 봉급에 불만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때도 봄이긴 했다 H에게 연락이 왔다 형님 잘 지내셨어요,라는 메시지였다 오랜만의 그의 메시지에서는 내가 아는 H가 아닌 마치 다른 남자의 말투가 느껴졌다 내가 알던 H가 아닌 듯했다 아니 아니었다 그렇지만 오랜만에 반가웠던 나는 버선발로 마중 나가듯 답변했고 H는 마치 그 옛날 그때 그곳 벤치의 그날처럼 오늘 저녁에 치맥 해요,라고 했고 나는 이제 그 어떤 거리낌도 없었다 그리고는 만난 H는 내가 처음 본 스포티한 차림이었다 그리고 많이 말라 보였다 생각보다 H는 가냘퍼보였다 체격의 관점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부분에서 말이다 H는 나를 보며 형님 보고 싶었어요,라고 대뜸 말했다 그때 그날처럼 희한했던 나는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한 큰 눈을 떴고 H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딸이 하나 있는데 그 딸이 어릴 적 자폐 판단을 받았단다 하지만 가정의학과 의사인 와이프가 자신의 딸이 자폐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해 초등교육을 받기까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거기에 더해 본인이 갑상선에 혹이 생겼는데 암일 가능성이 있어서 당시 자신에겐 퇴사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고 했다 지금은 괜찮아, 고르고 고른 말인데 너무 상투적인 그 말이 내 입에서 나왔다 그러나 H는 밝게 웃으며 그럼요, 맥주 몇 잔 정도는 괜찮아요,라고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게 아니었는데 뭔가 너무도 자연스러운 그의 대답에 그저 웃으며 맥주를 목 뒤로 넘겼다 그렇게 많이 마시지 않았는데 머리가 띵할 정도로 아파왔다 다음날 아침 머리를 부여잡고 출근길에 H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형님 어제 감사했어요 저는 예전에 회사에서 하던 사업을 직접 한 번 해보려고요 조언 필요할 때마다 전화해도 되죠, 그게 벌써 5년 전이다 스타트업의 CEO가 된 H는 다시금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H의 편안한 차림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H는 웃으며 이미 안주는 다 시켰으니 얼른 앉기나 해요 뭐 그리 바쁘다고 바쁜 일도 없는 양반이 약속 시간에 늦어요, 아니 내가 나가려는 게 한상무가 잡아가지고는 말이 길어졌어, 아 한상진 상무요 그 양반 꼭 퇴근하려는 사람 잡아두고 말 걸더니 아직도 옛날 버릇 못 버렸나 보네요, 그러게 말야, 사람이 일관성 있네요, 그러게 말이람, 도달도달 이야기를 시작하다 보니 뉘엿 거리며 넘어가던 해가 완연히 지고 있다 아스팔트의 열기가 올라오는 여름의 밤이다 마치 우리의 삶 또한 봄을 지나 여름에 안착한 것처럼 말이다 여름의 풀은 봄과는 또 다른 매력이지만 그만큼 햇살이 따갑기도 태풍이 사나워 두렵기도 하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 생각보다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되기도 한다 간만에 마음이 즐거운 날이다 아 그리고 이제는 와이프에게 거짓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와이프가 H의 근황을 가끔 궁금해할 정도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