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DO IT" 은 너나 하세요
"유캔두잇!"
그 말이 왜 이렇게 피곤하게 들렸을까.
어떤 날은 나에게 용기를 주는 말이었고,
어떤 날은 나를 떠미는 구호처럼 느껴졌다.
너무 자주,
너무 쉽게 들었기 때문일까?
그 말을 하는 사람 중에 진짜
내 안을 본 사람은 없었으니까.
아무도 “정말 할 수 있는지”
물어봐주지 않은 채,
“당연히 너라면 할 수 있지”라는
말로 나를 몰아세웠다.
그게 칭찬처럼 보였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아직, “뭐든(정체성 상관없이) 되는 사람”이
되길 원했을 때 말이다.
전 회사의 팀장님이 있었다.
좋게 말하면 ‘판을 키우는 리더’,
조금 직설적으로 말하면
‘사람을 밀어 넣는 리더’.
하루는, 중요한 피티 자리가 잡혔다.
대기업 대표와 임원들이 함께 하는 자리.
부사장님도, 팀장님도 부담스러워한다며,
팀 전체에 말하길,
“이 자리는 정말 철저히 준비해야 해.”
문제는,
그 발표를 지시한 대상이었다.
입사부터 현재까지 영업 미팅에 나가본 적 없는,
디자인 업무를 맡은 팀원 한 명이었다.
모두가 당황했다.
작게 웃으며 눈치 주는 사람도 있었고,
아무 말 없이 자리만 지키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말했다.
“이 자리가 그렇게 부담스러운 자리라면,
처음엔 팀장님과 제가 함께 나가고,
추후에 디자이너가 다음 스텝을 이어받는 게 어떨까요?”
팀장은 그 자리에서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외쳤다.
“네가 왜 이 디자이너의 기회를 뺏으려 해?”
순간 공기가 멎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단지, 기회를 ‘준비되지 않은 책임’으로
만들지 않기 위한 말이었는데.
회의가 끝나고,
그 디자이너에게 찾아가 말했다.
“그게 기회를 뺏으려던 게 아니야.
그냥 네가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않았으면 해서 그랬던 거야.”
그리고 팀장에게도,
다음 회의 때 정중히 사과했다.
"말씀드리는 방식이
조심스럽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후로도 나는 종종 생각했다.
‘내가 그때 너무 나섰나?
아니면, 그냥 조용히 있었어야 했던 걸까?’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스쳐 지나갔던 말들 목에 걸렸다.
- 유캔두잇.
정말 나를 위한 말이었을까?
내가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가 아니라,
회사가 나를 믿어서가 아니라..
나는 그날 이후로,
‘할 수 있어’라는 말의 무게를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그 말은 응원이 될 수도 있고,
책임을 던지는 칼날이 될 수도 있다.
누구에게,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내가 좋아하는 리더는,
자기 손에 흙을 묻혀본 사람이다.
먼저 해보고,
실패해보고,
그 과정을 보여주며 팀원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
"봐, 나는 이렇게 했어.
이제 너의 방식을 찾아, 시도 해봐."
그 말이 진짜 ‘유캔두잇’이다.
그건 오지랖이 아니다.
그건 방향이다.
회사를 나온 지금도,
나는 가끔 내게 묻는다.
"너는 지금 뭘 할 수 있니?"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나는 겸손해진다.
“아무거나” 두잇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진심을 담아“ 할 수 있는 것만 한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진짜 유캔두잇이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닌,
내가 선택한 일.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일.
내가 성장할 수 있는 일.
그것을 두잇한다.
그러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내게 말하는 것이다.
유캔두잇은, 너나 하세요.
나는,
내가 선택한 것을,
내가 책임지는 방식으로,
조용히, 정확하게,
그리고 꾸준히 해낼 거니까.
그게 나만의 스프레짜투라니까.
훗날, 이 글을 읽는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때 너, 많이 조심스러웠지.
자꾸 눈치를 봤고,
남의 기대를 짊어지느라 네 속은 보지 못했어.
그런데도 끝까지 묵묵히 해냈구나.
고마워.
그때 너,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스스로를 지키려 했던 그 마음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어.
그때 네가 말했던 그 한마디,
“유캔두잇은 너나 하세요”라는 말이
어쩌면 너의 용기였고,
너의 애정이었고,
너의 선언이었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러니까 괜찮아.
앞으로도 너무 많은 걸 하지 않아도 돼.
너의 걸음이,
너의 선택이,
너의 중심이 되어주는 삶이면 충분하니까.
오늘도 살아내줘서 고마워.
그때 너여서, 그게 나라서 참 다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