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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부 Oct 24. 2022

스팸메일은 그만 보내요

을이 되어 메일을 기다리는 순간에는

스팸메일은 그만 보내요


어제는 열 통

오늘은 열네 통의 메일


내 이름이 적혀있지만

나를 생각하며 적지 않은 문장들을 읽어요

섭섭한 얼굴이 되어 광랜 너머의 발신인을 떠올립니다


한 명만 걸리길 바라는 마음으로

수천 명의 수신인을 입력하는 손가락을 생각해요

그런 발신의 시작은 기계인 걸까 사람인 걸까 궁금해져요

기계가 아니면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인간은 왜

인간이 만든 것에서 사람을 지우려고 할까요

그건 알고리즘인데요 라고 말하면 

죄책감이 조금 지워지는 걸까요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섭섭한 마음을 지웠다가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섭섭한 마음이 진해져요


차단을 하면 될 텐데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차단하는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면

차단을 했다가 차단을 푸는 사람의 마음이 떠오르거든요

결국 차단하지 못하는 사람의 변명을 반복하게 돼요


나는 목적 없이 당신에게 편지를 쓰지만

메일함에 도착하는 편지들은 저마다의 목적이 있어서 

미워지는 순간들이 있는데요 라고

안달 난 문장을 봉투에 넣고

수신인 없는 메일로 발송하면

오늘의 할 일은 끝이 나요


메일함에 쌓이는 건 내 과거의 답장들

어젯밤의 호기심과 월요일의 플렉스

읽고 보고 듣고 느껴달라는 애원 앞에 서면

답장을 기다리는 마음이 비참해져요

마음에 드는 답장이 하나도 없는데

과연 내가 목적의 상실을 논할 자격이 있을까요

들켜버릴 거짓말은 앞으로 하지 않겠습니다


다짐 또 다짐을 해요


기다리는 것은 언제나 오지 않지만 

변함없이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아가요


매일 편지를 쓰는 사람이 

조금씩 약자가 되어가는 이유를 알고 있어요

기대하는 사람을 사랑하기가 점점 힘이 들어요


얄팍한 상술의 세상

답장을 기다리는 멍청이로 보이면 안 되죠


얕은 마음을 첨부하여 보내기를 누를게요


 



모르는 번호로 오는 연락이 싫었는데 을로 살아가는 시절에는 다 받고 말았다. 취업을 준비할 때는 더 그랬다. 요즘 같은 시대에 합격발표를 전화로 해줄리는 만무한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전화기를 붙들고 다니며 모르는 번호만이 나를 여기서 구원해줄 것만 같은 기대를 했다. 모르는 번호로 걸려오는 전화의 대부분은 대출 광고였다.


요즘 메일함에는 스팸메일만 자꾸 쌓이는데, 나는 하루에 세 번 이상은 메일함을 열어본다. 기다리는 답장이 있을 것만 같아서.


마음을 몹시 쓰는 것들에게 “난 아무 목적이 없다”고 말할 때가 많지만, “그러니까 너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건 ‘진실’이라기보다는 ‘다짐’에 가까운 것이었음을 인정해야하지 않을까. 매일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 약자가 되는 건 답장을 기대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나는 기대하는 마음들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는데, 이 바람도 하나의 기대겠지. 나는 섭섭한 마음을 좀 그만 품었으면 좋겠는데. 어머나, 이것도 하나의 기대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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