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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부 Oct 05. 2022

그 다음의 새끼

전화는 끊긴지 오래였다

그 다음의 새끼



횡단보도 맞은편에

사람 하나 서 있다


차들이 얼마나 밟고 지나갔을까

희미하게 흔적만 남은 줄무늬보다

더 흐릿한 얼굴로

울고불고 소리치는 사람이 하나 서 있다


이 새끼 저 새끼

쓰레기 같은 새끼야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며

속수무책으로 견디는 전화기를 나무라는


엉엉 우는 사람

그 주위로

반발자국 두께의 윤곽선이 감싼다


다음에는 어떤 새끼가 나오려나

횡단보도에 선 얼굴 모두가

초록 불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초로한 귀를 기울이고


애인의 손을 꼭 잡은 남자는 손을 들어 애인의 귀를 막았다 그 품에 안겨 애인은 괜찮다고 웃었다 “자기야 저 사람 미친 여잔가 봐” 행인들은 질세라 서로 웃기 시작했다 아니면 혀를 쯧쯧 찼다 함께 울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이해의 순간부터


미친 여자가 될 가능성이 드러나는 셈이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손가락 끝에 불을 밝힌다

엄지를 두드려 적는 가볍고 날카로운 파편들

- 나 방금 미친 사람 봤잖아

쉴 새 없이 두드려대는 스크린 아래로

하얀 줄무늬가 헐어가고


차마 횡단하지 못한 사람 하나

그곳에 외딴 섬처럼 홀로 남았다


여자의 전화는 끊긴지 오래였다

휴대폰 너머로 전해지지 못한

좀이 쑤시게 기다리던 그 다음 새끼는

궁금한 표정 뒤로 귀를 기울이던 얼굴들 차지였다






언제였더라. 어릴 때 엄마 손잡고 길을 걷다가, 공중전화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 여자를 본 적이 있었다. 사람들이 공중전화를 이용하던 시절이었으니까 이십 년은 더 된 것 같다. 횡단보도에 선 사람들 모두가 다 그 여자를 보면서 수군댔다. 나도 엄마한테 “저 사람 제정신 아닌가 봐”라고 말했는데 그때 엄마는 내 손을 잡아서 가던 길을 이끌며 “무슨 사연이 있겠지”라고 했다. 그래, 무슨 사정이 있겠지.


시간은 흘렀고 공중전화는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많고 나는 그들을 쉽게 오해하고 욕하고 또 혀를 끌끌 찬다. “엄마. 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어”, “엄마, 나는 보통으로 잘 살고 싶거든” 계속 되뇌면서. ‘무슨 사정이 있겠지’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내가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될까 봐 걱정했던 것 같다. 가난이 가난을 혐오하고 약자가 약자를 비난하고 소수가 소수를 경멸하는 건, 마치 나는 그 반대편에 서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건, 가난하고 약자이고 소수인 나를 인정하면서도 인정하지 않는 행동이다.


지금 필요한 건 선 긋기가 아니라 손 내밀기라는 생각이 든다. 무슨 사정이 있겠지. 그때 엄마의 혼잣말처럼. 내 손을 꽉 움켜쥐던 엄마의 이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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