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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운서 Sep 06. 2020

2주 차. '좋은' 스피치(2)

'정석'이 정석인 데는 이유가 있다.

2-2. 
 
'정석'이 정석인 데는 이유가 있다.  
 
"좋은 스피치는 적절하고 핵심적인 아이디어를 고안(invention)하고, 이를 논리적으로 조직(organization)하며, 적절한 표현 양식(style)을 통해 구성한 후, 효율적으로 기억(memory)하여 감동적으로 발표(delivery)할 줄 안다." 
-아리스토텔레스 
 
고등학생 때 저는 '수학의 정석'이라는 책을 참 싫어했습니다. 너무 고루하달까요. 그 오래된 느낌이 저는 싫더라고요. 근데 정석이 '정석'인 데는, 정석이 그렇게 오래 쓰이는 데는 이유가 있죠. 그것이 진리이거나 진리에 가장 가깝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좋은 스피치는 자연스러운 스피치라고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에서만 끝나면 안 되겠죠. 자연스럽게 아무 말 대잔치하는 것을 좋은 스피치라고 할 수는 없을테니까요. 그래서 '좋은 스피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스피치의 정석'과도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바탕으로 풀어가 보려고 합니다. 
 
좋은 스피치를 위한 첫 단계는 '고안(Invention)', 즉, 스피치에 쓸 여러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것입니다. 여행 가기 전에 캐리어에다가 필요한 물품들을 하나씩 준비해 넣는 것처럼 한 번의 스피치를 하기 위해서도 그렇게 아이디어들이 준비되어야 한다는 거죠. 지갑이 두툼해야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 것처럼(?!) 내가 할 스피치에 대한 아이디어, 내용들이 많이 준비되어 있다면 그 스피치가 좋은 스피치가 될 확률이 더 높아지겠죠.  
 
단, 전제 조건이 붙어요. 그 아이디어들이 내 스피치 주제와 방향에 적절하고 또 핵심적이어야 한다는 거죠. 여행가방 쌀 때 괜히 필요 없는 것들 이것저것 다 넣으면 여행 가서는 짐이 되잖아요. 스피치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무엇에 대해 이야기할지 즉, 스피치 주제가 명확해야 하고 더 나아가 내가 고안해내는 스피치 내용들이 그 주제와 청중, 스피치 상황 등에 적절하고 핵심적인 것들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아이디어를 떠올렸으면 이제 스피치를 본격적으로 조직(organization)해야겠죠. 떠올린 아이디어들을 배치하는 단계입니다. 글의 '개요'를 생각하면 편해요. 이 부분에서 중요한 건 조직은 논리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피치의 처음부터 끝까지 내용이 일관적이고 체계적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거죠. 
 
스피치를 듣다 보면, 또 누군가가 쓴 글을 보다 보면 재밌는 경우가 많아요. 이야기가 산으로 간다고 하잖아요? 분명 자기소개 스피치였는데 어느 순간 본인이 기르는 강아지 꼬미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더니 꼬미가 얼마나 귀여운지에 대해 말하며 스피치가 끝나요. 그럼 제가 들은 건 누구의 자기소개였을까요? 학생의 자기소개였을까요, 꼬미의 자기소개였을까요...? 이런 글이나 스피치를 저는 '\자형 스피치'라고 해요. 시작한 이야기가 정말 산으로 가면서 끝나는 거죠. 
 
그래도 대부분의 분들은 시작과 끝이라도 일치시키려고 하더라고요. 본론 정도에서 다른 데로 샜다가 정신 차리고 적어도 결론은 똑바로 내는 거죠. 위의 예를 다시 쓰면 자기소개하다가 꼬미에 대한 이야기로 갔다가 마지막은 다시 자기의 이야기로 끝내게 되는 거죠. 이러한 스피치는 '> 자형 스피치'라고 저는 말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만족해서는 안 돼요. 스피치가 논리적으로 조직되었다는 것은 '│'자형으로 스피치 내용이 조직되는 것입니다. 서론부터 본론을 지나 결론까지 내용 배치가 일관적으로 되는 것이죠. 자기소개면 처음-중간-끝 모두 나에 대한 이야기여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스피치를 준비하는 내내 내가 무엇에 대해서 말을 하려고 하는지 잊으면 안 됩니다. 또 준비해둔 아이디어를 너무 소중히 여겨도 안 돼요. 막상 적절하고 핵심적인 아이디어라고 준비해뒀지만 스피치를 본격적으로 조직하다 보면 생각보다 스피치 방향에 안 맞는 것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럴 때 준비해둔 아이디어들을 버리기 아까워서 억지로 갖다 쓰려면 결국은 그 아이디어가 스피치를 잠시라도 다른 데로 새게 해요. 아이디어도 중요하지만 스피치의 조직이 논리적으로, 일관성 있게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음 단계는 '적절한 표현 양식(style)'입니다. 내용을 고안해서 잘 조직했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이것을 어떻게 발표할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거죠. 쉽게 말해서 '스피치 스타일'을 결정하는 겁니다. 유머를 사용하면서 밝은 분위기의 스피치를 할지, 조금은 진지하고 엄숙하게 신뢰감을 주는 스피치를 할지, 몇 명과 대화하듯이 편안한 스피치를 할지, 대극장 무대에 선 배우처럼 연단을 사로잡는 카리스마 넘치는 스피치를 할지 등을 말이죠.  
 
물론 여기에도 아주 중요한 전제가 붙습니다. 적절해야 한다는 거죠. 스피치 스타일은 내가 하는 모든 스피치에서 똑같으면 안 됩니다. 안광훈이 하는 스피치가 주제와 내용 상관없이 똑같은 느낌이라면 저의 스피치는 성공적인 게 아니에요. 배우가 배역에 따라 모습을 바꾸듯 스피치 스타일 역시 그 스피치의 주제나 내용에 따라 조금은 바뀌어야 합니다. 스피치 주제와 내용에 스타일이 맞아야 한다는 거죠.  
 
다음 단계는 '효율적으로 기억(memory)'하라는 겁니다. 번역에 따라 이 부분을 '암기'로 번역하시는 분들도 있는데...저는 스피치를 외워서 하는 걸 무척이나 경계해요. 뒤에서 더 자세히 얘기하겠지만 철저히 외워서 하는 스피치는 결코 좋은 스피치가 아니거든요. 내가 암기한 걸 계속 떠올리려 하는 데 에너지를 쓰기 때문에 청중과 상호작용하기 힘들어지고 그러다 보면 당연히 자연스럽지 않은 원맨쇼가 되어버리겠죠.  
 
그렇다고 아예 외우지 말라는 말도 아닙니다. '효율적으로 기억'하라는 거죠. 오프닝, 클로징, 그리고 본론에서도 꼭 해야 하는 중요한 말들은 당연히 외우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지거나 너무 이론적인 부분들은 ppt나 대본에 넣어놓고 어느 정도는 그대로 읽어도 상관없어요. 확실히 외울 부분과 이야기하듯이 풀어 갈 부분에 대한 선택과 집중이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스피치 대본을 다 외워야 한다는 압박에서 부디 벗어나시길...! 
 
마지막으로는 '감동적으로 발표(delivery)'하는 것입니다. 저는 저 '감동적으로'라는 말이 참 마음에 들어요. 우리가 누군가의 말을 듣고 사실 무언가 남았을 경우에는 어떠한 지식이나 논리적 내용보다 '마음의 움직임', 즉 감동이 남았을 확률이 보통은 더 큽니다. 내 스피치를 청중 모두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받아 적으면서 열정적으로 듣고 싶어 하는 그러한 경우가 아니라면 청중 마음에 감동 하나만 살짝 남겨줘도 성공적인 스피치라는 거죠. 
 
대학 때 창작 연극을 한 적이 있었어요. 복수를 소재로 하는 살짝의 판타지적 소재가 섞여있는 스릴러 극이었습니다. 배역 오디션을 하는데 저는 원래 반항기도 살짝 있으면서 극 중 로맨스도 있는 '의대생' 역할을 하고 싶었어요. 근데 연출이 대사도 많지 않은, 악마인지 사람인지도 잘 모르겠는 배역의 대사를 해보라고 갑자기 시키더라고요. 극 전체의 마지막 대사였는데 아직도 확실히 생각나요. "말하지 않았습니까,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고."...  
 
그걸 하고 나오면서도 연출에게 신신당부했어요. 저는 의대생을 하고 싶다고 말이죠. 그런데 집에 오는 내내 저 대사가 비릿하게, 뭔가 씁쓸하게 제 마음에 계속 남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연출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했죠. "나 그 대사가 자꾸 맴돌아." 그랬더니 "맞아, 우리 연극을 본 사람들이 마지막에 그 대사 하나로 네가 지금 느낀 그 비릿함 하나만 느끼게 된다면 우리 연극은 성공이야."라고 답을 하더라고요. 그리고 결국 저는 의대생이 아닌, 그 대사를 하는 배역을 맡게 됐습니다.  
 
한 시간이 넘는 공연이지만 마지막 대사 단 한 마디가 관객에게 비릿한 느낌 하나만 남기면 그 공연이 성공인 것처럼 스피치도 청중들 마음에 무언가 하나만 느끼게 한다면, 작은 감동 하나만 줄 수 있다면 무척 성공적인 스피치가 된다는 거죠. 
 
참 오래된 말인데 현대의 스피치에도 빠짐없이 전부 다 적용되는 것을 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새삼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시간이 오래 흘러도 이렇게 살아남아 있을 말들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큰 욕심일까요? 
 
수학에만 정석이 있는 게 아니라 스피치에도 정석이 있다는 것! 기억해주시길 바라며 이번 시간 마무리할게요.   


 


<자칭 꼰대 교수의 강의 노트 2-2>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좋은 스피치의 5단계 정리 
 
1) 적절하고 핵심적인 아이디어들을 떠올린다.  
2) 아이디어들을 논리적으로 조직한다. 
3) 주제에 맞는 적절한 스피치 스타일을 결정한다. 
4) 효율적으로 기억한다. 
5) 발표를 통해 청중들의 마음에 감동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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