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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질고개 Feb 17. 2024

2. 유년 시절의 추억

천재 모차르트, 그에게 고통받은 우리의 살리에리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초등학교 시절, 나의 모차르트를 생각한다.


시꺼먼 얼굴에 뒤떨어진 아이였던 나는 도시 학교에서 항상 아웃라이어(Outliers)였다. 반면에 그녀는 초등학교 6학년 우리 반 반장이자 전교 부회장이었다. 얼굴도 예쁘고 전교 수석을 도맡아 했던 똑똑한 아이였다. 중년의 담임 선생님은 학급 운영 권한의 대부분을 그녀에게 맡겼다. 그녀는 사실상 우리의 ‘작은 선생님’이었다.


그녀의 가장 막대한 권한은 자율학습 점검이었다. 자율학습 후 집에 가기 위해서 우리는 점검 퀴즈를 통과해야 했다. 퀴즈의 정답을 맞히지 못하는 사람은 추가 자습과 청소를 해야 했다. 그 시간은 두려움과 공포였다. 그녀의 말에는 누구도 대들거나 변명할 수 없는 힘이 있다. 덩치 큰 씨름하는 놈들조차 꼼짝 못했다. 그녀는 우리 학급의 절대 권력자 -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어느 날, 자율학습 점검 시간이었다. 한 사람씩 앞자리에서부터 순서대로 마구 휘둘러대는 그녀의 퀴즈 권력은 매서운 칼부림과 같았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나는 불안과 긴장으로 책상에 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마치 형장의 단두대에 축 늘어진 몸을 맡기며 목을 내민 죄수와 같았다. 그녀는 왼손에 들고 있는 참고서를 자로 툭툭 치면서 퀴즈를 냈다. 문제를 복잡하게 꼬는 그 퀴즈를 내가 맞출 수는 없었다. 사실 나는 그때 너무 긴장해서 퀴즈 문제가 뭔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했다.


‘아. 오후에 시골 가는 버스를 타지 못하면…. 막차를 타야 하는데 큰일 났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퀴즈가 잘못됐다”라고 하며 문제를 다시 냈다. 동시에 그녀가 들고 있던 긴 자가 책상 위에 가리키는 곳이 있었다. 내가 책 덮기를 깜박 잊고 펼쳐 놓은 그 페이지의 내용이었다. 나는 그 문장을 읽으면서 퀴즈 정답을 맞힐 수 있었다.


그 짧았던 단 한 번의 기억은 유년 시절의 오래된 사진처럼 남았다. 나는 그녀의 특별한 마음이라는 착각을 가끔 했다. 솔직히 학업이 뒤처진 촌놈에 대한 불쌍한 마음에서 오는 배려였을 것이다. 아니면 그냥 일상에서 무심히 벌어지는 ‘확률 통계적 우연’ 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그날의 퀴즈 시간은 지금까지도 내 기억에 생생하다. 특별한 감정보다는 부족했던 유년 시절의 한 장면으로 오랫동안 기억하게 해 주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뛰어난 지적 능력으로 우리 반 남자들을 제압했던 그때 그 현장을 내 눈으로 직접 봤다. 그녀의 절대적인 권력에서 베푸는 약간의 배려와 관심에 우리는 감사하고 감동했다. 주변에는 그녀를 따르는 또 한 명의 여학생이 있었다. 앙칼지고 매서운 눈을 가진 공격적인 그녀는 모차르트 주위에서 협력했다. 그녀는 자율학습 퀴즈도 예외였다.


그렇게 우리 반 모두가 철저히 통제되고 장악되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그녀와 헤어졌다. 그 당시의 중고등학교에는 남녀공학이 없었다. 그녀는 여자중학교로 진학했다. 모차르트를 벗어나면서 당시 교육 제도의 최대 수혜자는 우리 남학생이라고 생각했다.


일률적인 오직 단 한 가지의 기준만으로 미미한 차이를 찾아 학생의 순위를 매기는 학교에서의 평가 방식은 우리를 숨 막히게 했다. 그러나 교실을 벗어나기만 하면 세상에는 넓고 다양한 분야에서 각자의 일들이 있다. 교실의 절대 강자는 각자의 선택에 따라 사회 여러 분야에 흩어지게 된다. 우리 살리에리는 그들과는 다른 공간에서 제각기 희망을 품고 노력하며 자신만의 꿈을 꿀 수가 있다. 나에게도 ‘다양성’, 이 평등한 세상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미숙했던 우리 남자들은 하향 평준화가 된 듯한 남자중학교로 진학했다. 나는 그곳에서 힘이 지배했던 사춘기, 말 그대로 질풍노도기의 정글에서 3년을 보냈다.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 가을,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고로 나는 사람이 되었다. 뒤늦은 공부에 시간이 부족하여 1년 더 재수해서 겨우 대학 진학을 할 수 있었다.


서울에서의 대학 1학년, 고등학교 동문회로 신입생 환영회가 있었다. 그 당시는 여자고등학교와 연합 동문회로 진행되었다. 나는 조금 늦게 식당에 도착해서 까치걸음으로 빈자리를 찾아갔다. 사람들과 눈인사를 나누다가 맞은편 조금 떨어진 문과생들이 모인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는 한 여자를 봤다. 그녀였다! 여전히 똑똑한 눈매에 하얀 얼굴, 나는 단번에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잊을 수 없었던 그 오랜 시간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눈앞에 그때의 기억들이 크고 작은 사진으로 겹쳐지며 나는 갈 곳을 찾지 못했다. 친구들에겐 갑자기 가봐야 할 곳이 있다며 핑계를 대고 반사적으로 그 자리를 황급히 뛰쳐나와 나의 모차르트를 용케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이후 대학 4년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동문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소외되고 분리되었던 내 유년 시절의 초라함이 트라우마처럼 반사적으로 위축되면서 그렇게 행동한 것 같았다. 그 상황을 생각해 보면 나 자신도 놀랐고, 어린 시절의 내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밤늦게까지 목이 메고 자꾸 울게 되었다. 또 마음이 불안하고 우울해졌다. 인제 와서 나 자신이 부끄러운 건지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런 불편한 자리는 피해야겠다고 다짐했던 것 같다. 나는 애매한 것이 싫었다.


대학 1학년 그해 가을, 아내를 만났다. 어렵고 힘들었던 대학 시절 내내 우리는 서로 도와가면서 함께 지냈다. 결혼 후 어느 날, 처남으로부터 우연히 아내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었다.

“매형! 우리 누나, 학교 때 공부 잘한 거 알아요? 우등생으로 학급 임원도 여러 번 했었는데…. 몰랐죠? 하-참! 우리 누나랑 잘 살아요!”


아내는 도시에서 어릴 적부터 예쁘고 공부도 잘했단다. 그것도 서울에서 초등학교 6학년 반장을 했단다. 아내는 오늘 학교에서 수업이 힘들었다며 아이들과 함께 내 곁에 잠들어 있다. 나는 아침 출근길에 경부고속도로를 질주할 때마다 조용필의 ‘산유화’를 듣는다. 그리고 ‘슬픈 베아트리체’, ‘바람이 전하는 말’, ‘걷고 싶다’…. 세월이 참 빠르다.


살리에리, 이 세상 사람들의 99%는 그의 마음을 알고 있다.

모든 살리에리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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