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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HN SIHYO Oct 04. 2016

고향을 찾아서

50년 만에 찾아간 그 고향

가끔

할머니는 고향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고향에서 용인으로 온 지 벌써 50년이 넘었지만 

할머니는 그 고향을 잊지 못하고 계셨어요. 

태어나서 17살까지 살던 그 고향을 이번에 다녀왔습니다.


우연히 할머니에게 고향에 가보고 싶지 않냐는 말을 꺼낸 것이 시작이었죠.


할머니와 이모할머니를 모시고 할머니의 어린 추억이 남아있는 담양으로 갔습니다.


담양

사실 혼자서 4~5번 왔던 곳입니다.

메타세콰이어길도 

소쇄원도

죽녹원도

그리고 맛있는 떡갈비까지

놀라운 것은 할머니의 고향을 한 번 왔었다는 것이죠.


할머니는 항상 고향에 가면 할머니 이름 석자만 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 아는 사람이고 그 고향에 있는 땅이 예전에 할머니네 땅이었고 집이 엄청 컸다고 했죠.


할머니의 할아버지는 일본에서 돈을 많이 벌어오셔서 땅을 많이 살 수 있었고 지역에서는 그분이 '이 판사' 성이 '이'입니다. 그래서 '이 판사'라고 불린 것이죠. 이 판 사라고 불릴 정도로 지식이 많고 지역을 위해 일하셨다고 해요. 

많은 이야기를 들으면 비슷한 패턴이 있는데 할머니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버지가 힘들게 돈을 벌어 온 것을 모르고 놀음을 하다가 돈을 다 날려 먹었고 그러다가 정읍으로 이사를 갔다고 합니다.


이번 여행

용인에서 시작해 

정읍의 신태인을 거쳐 담양을 갔습니다.


정읍에서 있던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해요.


호남지방의 그 넓고 넓은 논은 이미 한차례 수확을 하고 수확하면서 떨어진 쌀들이 다시 자라 또 여물고 있었어요.

할머니와 이모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담양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집을 찾아 나섰죠.


사진을 찍은 동네의 절반 넘는 땅이 할머니의 할아버지가 소유하고 있던 땅이었다고 해요.


길에서 골목을 들어서면서 바로 있는 집이 할머니가 자란 집이었다고 합니다.

할머니가 계속 이야기했던 사람의 이름이 문패에 쓰여있는 것을 보니 뭔가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할머니는 얼마나 기대되었을까요?


할머니가 자란 집 바로 옆에는 할머니의 큰집이 있었습니다.

거의 어릴 때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고 하셨어요.

여기는 외양간이 있는 공간이죠.


이 작은 방은 할머니가 할머니의 할아버지에게 한글을 배우고 한자를 배우고 그랬던 공부방이라고 해요.

훈장과 같은 역할도 하셔서 이 방에서 일제시대, 그리고 해방 후에 글을 교육하던 공간입니다.


이 뒤에는 머슴이 살던 작은 방도 있다고 해요.

시간이 흐르고 흐르면서 집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다 도시로 떠나고 이 곳에 남은 노부부는 집을 관리할 힘도 없고 자식들도 신경을 쓰지 않다 보니 폐가가 되어가고 짧게는 1년 길게는 10년 이내에 이 곳이 어떻게 될지 너무 궁금해졌어요.


집 뒤를 할머니가 보고 싶다 해서 같이 들어갔습니다.

할머니는 집 뒷 공간에서 어떤 추억을 갖고 있었을까요?

뒤에 있는 산을 보면서

한국전쟁 당시에 비행기가 뜨면 뒤에 있는 방공호에 들어가서 숨어있다가 비행기가 사라지면 나오고 그랬다는 이야기를 하셨고

우물을 보면서 물이 마르지 않는 우물이고 태어나서 처음 이 물로 할머니의 엄마가 씻겨주고 그랬다고 했습니다.

어릴 때 할머니는 어떤 사람이었을지 많이 궁금해졌어요.


집에 사람이 살고 있는데 집에 아무도 안 계셔서 선물만 올려놓고 나왔습니다.


이 담벼락 너머의 집은 할머니의 본가입니다.

아까 쓰러져가 보이는 폐가가 있던 곳은 큰 집이죠.


이 집은 옛날 집 배치를 그대로 두고 새로 벽돌집을 만들었더라고요.


그리고 문패에는 할머니의 사촌이 있었고요.

문이 잠겨있어 들어가 보지 못했어요.


할머니가 꼭 가야 한다는 집이 있어서 들렸습니다.

다 거기서 거기였어요.


할머니의 사촌이세요.

사촌 부부가 살고 있는데

50년 만에 만나서 

할아버지께서 할머니를 보고 가물가물한데 

할머니가 이름을 말하니까 

왜 이제야 왔냐고 하시면서 놀라셨어요.

그리고 그 옆에 분홍색 옷은 할아버지의 부인이신데 

할머니가 이 분이 결혼하는 것 보고 얼마 안 되어 이사 갔다고 하셨죠.


밥 먹고 계셨는데 

할머니랑 이모할머니 오셨다고 버선발로 나와서 맞이해주셨어요.


밥 먹고 가라고 하셨는데 이미 담양 시내에서 밥을 먹고 왔죠.


할머니가 옛 고향에 온 이유는 이 분들을 만나는 것도 있는데 할머니의 할아버지 묘소에 다녀오는 것도 있었어요.

그래서 묘소로 출발합니다.

왼쪽 아래 파란색 옷 입으신 분이 할머니의 동생하고 정말 닮아서 저는 그분이 여기 살고 계신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어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할머니의 할아버지 모쇼가 있습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벌초를 해주셨다는데

올해 디스크도 있고 몸도 편치 않아서 벌초를 못해주셨다고 해요.

세월이 흘러가면서 시골은 늙어가고 있었어요.


낫을 갖고 가지 않아 손으로 풀을 좀 뽑고 

돌아왔습니다.


두 분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요?

할머니가 하나하나 말을 합니다.

일바지를 입고 계신 할머니는 할머니가 부르시길 '성님'이라고 했어요.

사촌 오빠의 부인이셨어요.

할머니가 어릴 때, 이 곳으로 시집오셨는데

할머니는 그때 결혼식을 다 기억하고 계셨어요.

처음 여기 올 때 그렇게 예뻤는데 왜 지금은 쭈글쭈글해졌냐고...

그리고 손을 잡으면서 이젠 좀 쉬라고 하셨죠.

또 할머니가 형님한테 첫째인가 둘째를 낳을 때 우리 집 와서 애 낳을 준비할 때, 자기가 볏짚 싸들고 들어와서 전해주고 나갔던 거 기억하냐고 하셨고 

짧은 시간에 이 두 분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셨죠.


사진 속에 있는 배추 밭은 할머니가 제가 어릴 때부터 자기 집은 삼밭만 보고 들어가면 있다고 했던 밭이에요.

지금은 삼은 아니고 배추가 심어져 있었죠.

저 배추를 모두 할머니의 성님, 카트를 잡고 계신 할머니가 심고 가꾸신 것이었어요.

(배추 완전 잘 컸어요)

할머니와 이모할머니는 저 멀리 보이는 나무 보면서

저 나무가 200년은 더 살았을 거라고

할머니의 친구들

할머니의 가족들, 친척들

또 동네 사람들과의 추억들을 꺼내 놓으셨어요.


하룻밤 더 있다가 돌아가라고 하셨지만 

할머니는 알고 계셨죠.

할머니와 이모할머니가 하루 더 있다 가면 이 분들이 힘드실 것이라는 것을...


곧 다시 오기로 약속하고 우리는 할머니의 마을에서 나왔습니다.

할머니의 어린 시간이 머물러 있는 그곳을 다녀오니까 

생각이 많아졌어요.

다음에는 할머니의 친구들도 모시고 와야겠더라고요.


마을을 둘러보면서 계속 또순이, 에스꼬, 또 누구 이런 친구들의 이름을 말하시는데 할머니는 말을 하지 않아서 그랬지 친구들도 보고 싶으셨던 거죠.

(에스꼬라는 할머니 친구는 일본에서 태어나서 담양으로 이사 온 조선인의 이름이에요.)


담양 시내를 들어가니까

할머니가 어릴 때 사촌들, 삼촌들하고 몰래 담양으로 나와 사진을 찍고 뭘 먹고 그랬던 곳들이 이제는 사라진 것을 보시고는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갔다고 하셨어요.


50년의 시간이 지났고

일제강점기(할머니 말로는 왜정)를 보냈고

해방을 겪었고

한국전쟁도 경험하고 

전쟁이 끝나고 시작된 격변기를 경험한 그곳이었으니까요.


이번 여행 

할머니, 이모할머니에게도 특별한 순간이었겠지만

저도, 아빠도 엄마도 특별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고

사진이 아니고 

처음 출발부터 돌아오는 날까지 영상으로 남기지 못해서 너무 아쉬웠어요.


할머니는 휴전선 넘어 고향이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다행이지

휴전선 넘어 고향이 있는 분들은 얼마나 가고 싶을지...


01.10.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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