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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살기 좋아? 일본이 살기 좋아?

by 아호파파B

퇴근 후 집에 도착하면 먼저 욕실로 향한다. 욕조 뚜껑을 덮고 '자동 목욕' 버튼을 누른다.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목욕물이 받아져 있다. 식사를 마치고 아이들과 함께 욕실로 향한다.


"아~ 좋다~"


하루의 피로를 뜨끈한 욕조 안에서 풀어낸다. 이 풍경은 아호 가족이 하루를 마무리하는 모습니다. 아마 모든 일본인의 일상일 것이다.

한국 사람도 목욕을 좋아하지만 매일 욕조에 물을 받아 목욕하는 문화는 없다. 아호도 샤워만 하고 살다 가끔씩 목욕탕에 가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이제는 일본 목욕 문화에 익숙해져 하루라도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지 않으면 온몸이 찌뿌둥하고 잠도 안 온다. 아호에게 목욕은 단순한 씻기가 아닌 필수적인 의식이 되었다.




한국에 가면 이런 질문을 가끔 받는다.


"한국이 살기 좋아? 일본이 살기 좋아?"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아호는 항상 이렇게 대답한다.


"일본에 살면서 좋은 점은 딱 3개예요. 하나 맥주, 둘 스시, 셋 온천"


손가락을 하나씩 펼쳐가며 설명하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은 웃으며 말하지만 당시 선택의 기로에 있었을 땐 가볍게 말할 수 없는 주제였다.

아호는 선택했어야 했다. 한국에 살지. 일본에 살지




아호는 한국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었고 하루카도 일본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매년 해가 지날수록 평생 이대로 장거리 연애만 할 수 없다는 것을 서로 알고 있었다.

만약, 아호가 '한국으로 와'라고 하루카에게 얘기했으면 그녀는 가족, 친구, 지인들을 뒤로하고 한국으로 올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얘기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호는 젊은 시절, 해외에서 사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해외에 사는 것에 대한 멋진 환상이 있었다. 여행은 분명 새롭고 재미있다. 하지만 딱 한 두 달이었다. 잠시 미국에서 인턴쉽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많은 한인 교포분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분들의 공통점을 하나 알게 되었다. 타지에 살지만 한국을 그리워한다는 것이었다.

낯선 나라에서 평생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평생 섞이지 못하는 '이방인'으로 남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점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기에 아호는 쉽게 선택하지 못했다.





새벽 6시, 일본어 수업 시간

일본어 선생님이 질문을 던졌다.


“왜 일본어를 배우나요?”


'3년 동안 장거리 연애를 했습니다. 계속 이렇게 지낼 수는 없었어요. 그녀를 한국으로 부를까 생각했지만, 다른 나라에서 사는 게 얼마나 외롭고 힘든 일인지 알기에 제가 결국 가기로 했습니다. 제 여자를 힘든 상황에 두고 싶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실제로 입 밖에 나온 말은...


"일본에 여자친구가 있어요. 일본에 살고 싶어요. "


고작 이 정도였다.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였지만, 당시 아호 일본어 실력으론 표현할 수 없었다.

아휴... 눈앞이 캄캄했다. 일본어도 못하는데 일본 가서 밥 벌이는 할 수 있을까?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다니던 회사는 깔끔하게 때려치웠다. 어느 나라에서 살지 고민하던 것과 달리 퇴사 결정은 너무 쉬웠다. 아호가 퇴사를 선택한 이유는 급여나 고용 안정성 때문이 아니었다.

'30년 후 나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이 일을 그만둔 진짜 이유였다.

사무실 업무보다는 현장 근무가 많은 직업이라, 자리를 꼭 지키지 않아도 되었다. 이 직장에서 30년 넘게 일한 K부장은 전날 마신 술이 덜 깬 채로 항상 회사에 나왔다. 그리고는 조용히 어디론가 사라져 한참 동안 모습을 감췄다. 어차피 아래 직원들이 자기 일을 잘 처리할 것이고, 당장 눈에 띄는 문제가 생기지 않으니 상관없다는 식이었다. 직장 내 분위기도 오래 근무한 이런 꼰대들을 봐주는 편이었다. 자신들도 똑같은 대접을 받을 걸 기대하면서 말이다.

K부장과 직장 분위기를 통해 아호는 확실히 보았다.


'아! 여기서 계속 일한다면 30년 후엔 내가 딱 저 모습을 하고 있겠구나.'


아호는 멈춰 있는 조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결국 입사 1년도 채우지 않고 그만두었다. 퇴사와 동시에 일본으로 가서 살기로 마음먹었다. 일본어도 못하면서, 가서 뭐 해 먹고살 수 있는 능력도 없으면서 요즘 말로 하면 '근자감'만 가지고 있었다. 사실, '근거 없는 자신감' 이건 아호의 장점이자 또 한편으로 단점이었다.


그의 나이 스물아홉, 몸은 건강하고 머리는 여전히 잘 돌아갔다. 새로운 것을 도전하기 딱 좋을 때다. 더 이상 망설일 필요도 없었다. 아호의 마음은 이제 확고했다. 장거리연애를 종결하기로.

마음은 정해졌고 이젠 일본에서 뭐 하고 살아야 할지 고민해야 했다. 먼저 아호는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장난치기, 농담 따먹기, 뒹굴거리기... 나열해 보니 돈 버는 데는 다 쓸데없는 능력뿐이었다. 아호 친구 중에 해외에서 살고 있는 친구들이 떠올랐다. 타일 기술호주에 정착한 친구, 용접 기술캐나다에 정착한 친구, 섬유 기술베트남에 정착한 친구가 있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기술'을 들고 해외로 갔다.

그래, 이거다. 일본어가 안되니, 해외에서 살려면 먼저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현실적인 답에 도달했다.


당시 일본 취업시장은 그야말로 대 호황기였다.

아베노믹스 정책으로 무제한 양적완화를 실시하면서, 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30년'이라는 오랜 정체에서 벗어나려던 시기였다. 일본 대학 졸업생들은 취업할 기업을 쇼핑하듯이 골라서 들어갔고 기업은 좋은 신입사원들을 유치하기 위해 열을 올렸다. 그리고 언제나 뒤이어 등장하는 뉴스는 'IT인력 부족'이었다. 어차피 취업도 잘되는데 굳이 어렵고 머리 아픈 IT의 세계로 발들일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젊은 일본인들에게 IT업계가 외면받고 있다는 뉴스는 매번 등장했다.


IT 라면 한번 해 볼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생 4학년 시절, 집에 처음 PC가 등장했다. 대부분 게임용으로 사용되었지만 그의 인생에서 컴퓨터와는 꾸준히 좋은 관계를 보내왔다.

머리맡에 있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인터넷 브라우저를 열고 네이버 지식인에게 물어보았다.


"일본에서 IT로 취업하는 법"






매일 챗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이었다. 새벽 6시일본어 수업을 참가했고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진행하는 국비지원 프로그래밍 수업을 들었다. 이후 집에 돌아와서는 오늘 배운 내용들을 정리하고 복습했다. 만만하게 보고 시작했던 프로그래밍은 상상 이상으로 어려웠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코딩 책을 집어던질까 찢어버릴까 들었다 놨다 했지만, 결국 그녀에게 갈 미래를 상상하며 꾹 참았다.

여기서 일본인 여자 친구가 있는데 왜 일본어를 돈 주고 배우냐고 궁금할 수도 있다. 연애와 언어공부는 엄연히 다르다. 마치 운전을 가족에게 배우면 싸움 난다 같은 느낌이랄까?

원어민 여자친구에게 언어를 배우려면 여자 친구의 엄청난 인내력을 요구하게 된다. 서로를 위한 대화 시간에 5살 수준의 말만 내뱉고 있는데 엄청 답답해지지 않을까? 처음엔 좋은 의도로 시작하더라도 유치원생 수준의 대화가 이어지면 결국 지겨워지고 짜증만 남는다. 만약 본인이 어린이 수준의 외국어 능력이라면 함부로 원어민 여자 친구에게 외국어를 배우는 환상을 접는 게 좋다. 먼저 최소한 중고등학생 수준으로 올린 후 여자 친구와 외국어로 대화하는 걸 추천한다. 하루카는 일본어 선생님이 될 수 없었다. 대신 그녀는 엄청난 동기부여 원천이 되었다. 결국 언어는 꾸준히 공부하는 게 제일 중요한데 외국인 여자 친구가 있다는 점은 언어 공부를 지속하게 만드는 아주 강력한 이유가 된다.


이렇게 1년을 보냈다.

일본어 수업시간, 선생님이 아호에게 물었다.


"저번주 일본회사 면접은 잘 보고 왔나요?"


"3군데 면접을 봤는데, 한 군데가 정말 가고 싶은 회사였어요. 그런데 거기는 면접이 별로였습니다. 기술적인 부분을 많이 물어봤는데, 아직 실무 경험이 없어서 대답하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하고 싶은 말을 일본어로 선생님께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어와 비슷한 문법 구조를 가지고 있고, 어려운 발음 없어서 다른 외국어보다는 확실히 쉽게 배울 수 있었다. 프로그래밍 과정도 잘 마쳤다. 국가 기술 자격증도 따고, 어설펐지만 취업에 쓸 포트폴리오용 프로젝트도 만들었다. 이제는 일본어 이력서를 쓰고 해외 취업 활동도 시작했다.

1년 전만 해도 깜깜한 터널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묵묵히 내딛다 보니 희망 빛줄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앞자리가 2에서 3으로 바뀌었다. 25살 아호는 하루카를 만나 연애를 시작하여 어느덧 30살이 되었다. 이제는 조금 더 책임감을 가지고 한 곳에 정착할 나이였다.

1년 동안 한 가지 목표만 바라보며 달려왔다.


그녀와 함께 가정을 이루리라.


이제는 그 꿈이 현실로 보이는 듯했다.




일본에서 산지 7년 된 아호는 동네 목욕탕을 자주 간다. 일본 목욕탕은 노천탕이 꼭 있다. 그는 노천탕을 매우 좋아한다. 특히 겨울이라면 아주 환장을 한다. 차가운 바깥공기와 뜨끈한 탕을 동시에 즐기는 황홀감과 피로는 덤으로 풀린다. 매일 저녁 뜨끈한 욕조에 몸을 담그며 하루를 정리하는 이 평범한 일상이 결국 최고의 행복으로 귀결된다고 요즘 깨닫는다.


"한국이 살기 좋아? 일본이 살기 좋아?"



어쩌면 '어디가 살기 좋은가'라는 질문 자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어디서 사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어떻게 사느냐가 아닐까.


적어도 오늘 밤 아호의 목욕물은 뜨겁고, 맥주는 차갑고, 스시는 신선하니까.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그녀와 함께 하니까. 지금 이 시간이 제일 살기 좋다.

그곳이 어디든. 한국이든. 일본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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