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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여자와 연애하면 어떤지 아세요?

by 아호파파B

국제 택배가 도착했다. 보낸 이는 하루카였다.

박스를 열자, 직접 만든 수제 초콜릿과 작은 미니북이 들어 있었다. 밸런타인데이 선물이었다.

미니북 제목은 〈오빠를 좋아하는 26가지 이유〉였다. 책 속에는 함께 찍은 사진과 하루카가 적은 짧은 글들이 담겨 있었다.

좋아하는 26가지 이유 중 하나만 소개하자면...

“6: 가끔 어린아이 같아서 귀여움”이었다.

그때는 그 점이 좋다더니 요즘은 아들놈들 키우기도 힘든데 다 큰 어른 놈까지 키우고 있다고 불평을 한다. 왜 이제 와서 말을 바꾸는 건지.





일본은 여러모로 한국과 연애 방식에서 많은 차이가 났다.

일본 거리에서 연인끼리 손을 잡고 걷는 모습조차 보기 드물다. 연인들 사이 부담스러운 명품백을 선물로 주고받았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타인에게 불편을 줄 수 있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보니 기념일에 주고받았다는 선물이나 이벤트는 화려하기보다 심플하고 소소했다.


하루카와 5년간 연애하며 받은 선물들도 이런 일본 문화가 담긴 섬세하고 아기자기 것들이었다.

물론 사람마다 개인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병원에 입원한 친구를 위해 종이학 1000마리를 접어 주었다는 하루카 조카(고등학생)의 얘기를 듣고 꼭 하루카만의 개인적인 성격이라고 치부할 순 없고 어쩌면 일본 스러운 것 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요즘 한국 중고생들은 종이학 감성을 알까?)


한국 남자, 아호는 어떤 놈일까?

기념일에 친구들을 대동하여 촛불 하트 길을 만들거나, 차 트렁크 안 플랜카드와 풍선을 가득 싣고 서프라이즈를 선사했다는 같은 나라에 사는 다른 세상 남자의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아호는 그런 남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한국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의 달달한 이벤트 장면이라도 나오면, “아우~ 저거 사기다. 사기! 드라마에서 저러니까 여자들이 남자들을 오해하는 거야!!!” 이런 투정을 해댔다.

아호는 드라마 감성을 깬다며 엄마에게 등짝 스메싱을 맞았고, 여사친들에게 여자 마음도 모르는 놈이라며 눈총을 받는 남자다. 그럼에도 아호는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는 타입이었다. 얄밉지만 눈치는 빨라서 자신에게 굴러들어 오는 기회는 캐치를 잘하는 남자였다.

그날의 이벤트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의도했다고 하기엔 그냥 슬쩍 숟가락 하나만 얹은 사건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에서 공연장 관리 업무를 맡았다. 마침 특별 공연이 기획되어 특설 공연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같은 팀으로 배정된 조명감독, 음향감독, 무대감독님들 모두 입사 동기였다. 감독님들은 각자 자기 분야에서 경력이 넘치는 능력자들이었지만, 어쨌든 동기라는 이유로 아호와 허물없이 사이좋게 지내며 아호는 귀요미 막내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감독님들은 일본 여자 친구와 연애하고 있는 아호를 마치 자신들의 청춘 드라마라도 되는 양 열렬히 응원해 주었다.

1000일 기념일에 맞춰 하루카가 오기로 했다. 이 사실을 감독님들에게 전하자, 작은 이벤트를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계획은 이랬다. 공연이 끝난 뒤 관객들은 모두 내보내고 하루카만 공연장에 남게 한다. 조명이 꺼지면 1000일 기념 영상이 상영되고, 영상이 끝나는 순간 스포트라이트가 무대를 비춘다. 그때 아호가 ‘짠’ 등장해 꽃다발을 건네는 것이었다. 감독님들은 마치 자기 일처럼 신나서 꼭 해보라며 도와주겠다고 했다.

아호가 준비할 건 오직 두 가지뿐이었다.

1000일 영상꽃다발.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하루카를 위한 프라이빗 공연 날이 찾아왔다. 예정대로 하루카는 공연장에 와서 공연을 즐겼다. 공연이 끝나도 그냥 자리에 있으라고 미리 귀띔해 두었기에, 관객들은 모두 자리에서 떴지만 하루카는 말한 대로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3.2.1 스탠바이 액션!


공연장은 순간 어두워졌고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뒤 이어 아호가 밤 꼬박 새워 만든 1000일 기념 영상이 무대 스크린에 비치기 시작했다.

아호는 무대 뒤 작은 틈 사이로 하루카를 지켜보고 있었다. 객석이 어두워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녀가 영상에 완전히 빠져든 모습은 느껴졌다. 아호는 다음 순서를 머릿속으로 그리며 초조하게 영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준비하시고... 큐!


무대 뒤 문이 열리고 스포트라이트가 아호를 향해 내리쬐었다. 아호는 꽃다발을 들고 한 걸음씩 나아가 무대 정중앙에 섰다. 하루카를 보니 이미 감동의 도가니탕에 빠져 넋 나간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호는 소리쳤다.


"1000일 동안 함께 해줘서 고마워! 하루카!"


목소리가 공연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하루카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툭하면 터질 것만 같았다. 아호가 꽃다발을 내밀었다. 그녀는 천천히 무대로 걸어 나왔다. 하루카는 기쁨과 부끄러움이 뒤섞인 표정이었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갑자기 무대를 조종하고 있던 감독님들이 외치기 시작했다.


"뽀뽀해!"

"뽀뽀해!"

"뽀뽀해!"


객석에서 들려오는 열띤 응원에 두 사람은 더욱 얼굴이 빨개졌다. 아호는 잠시 망설이다가 모든 준비를 도와주신 감독님들을 위한 팬서비스로 하루카와 살짝 입맞춤을 했다.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이벤트.

다시 한번 말하겠지만... 절대... 아호가 준비한 거 아니다. 생각해 낸 것도 아니다. 다 된 밥상에 숟가락만 얹은 아호일 뿐이었다.

그래도 이 날 프라이빗 공연은 좋은 인연들이 만들어 준 특별한 선물로 아호와 하루카에게 평생 기억에 남게 되었다.




일본으로 돌아가는 공항, 하루카는 1000일 기념으로 1000피스 퍼즐을 선물로 주었다.

퍼즐이라곤 흥미도 없는 아호는 1000피스를 맞추는데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설마 이것도 일주일 동안 자기 생각하라는 하루카의 큰 그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퍼즐을 완성하니 진짜 선물이 나타났다. 퍼즐 뒷면에 그려진 QR코드였다.

해당 링크를 따라가니 하루카 연주 영상으로 연결되었다. 아호만을 위한 그녀의 세레나데였다.


♪ 매일 그대와~ 도란도란 둘이서~ 매일 그대와 눈을 뜨고파~♩ ♪ ♫ ♬


들국화의 <매일 그대와>를 노래 했다. 이 영상은 훗날, 아호가 그 시절이 그리울 때마다 방문하는 플레이리스트가 되었다.





일본인 하루카와 연애하면서 크고 화려한 이벤트, 값비싼 선물, 거창한 약속들이 아니더라도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수많은 방법들을 알게 되었다.

수제 초콜릿, 노래 영상 그리고 아호 좋은 점을 26가지나 찾아낸 미니북 같이 어쩌면 작고 소소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무엇보다 큰 그녀의 사랑이 가득 담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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